2023년 10월 18일
올해 86명 선발하는 경기도를 외면하고 5인 이하를 선발하는 곳에 엊그제 딸이 원서를 넣었다. 결심이 확고한 거다. 86명이나 선발하면 기본 경쟁률이 있다 하더라도 합격할 확률도 높다. 그런 조건에 굴하지 않고 끝내 결심한 대로 하겠다는 거다.
1차 D-day는 원하는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또 다른 발표일을 기다려야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 모녀는 이 동네를 곧 뜨게 될 거다. 퇴근길에 다리를 건너면서 해지는 풍경이 하도 그윽하여 잠시 설렜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매일 보다가 낯선 곳에서 삭막하기 그지없는 그곳에서 적응하는 동안 이곳이 또 얼마나 그리워질까......
그나마 너무나 아름다운 풍광을 일상으로 누리는 것에 감사하며 한껏 즐기며 살았다. 고향에서 매번 관광객 놀이를 야무지게 하며 잘 놀았다. 하루하루 아쉽지 않게 이곳을, 이 절기를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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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조금 긴 산책길에 나섰다. 점심 먹고 양치하기 무섭게 엉덩이 붙일 사이도 없이 끊임없이 잡무와 민원이 쏟아지는 그곳에서 사람답게 사는 게 이런 건 아니라는 것을 반복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는 그런 근무환경에도 아랑곳없이 누릴 것 다 누리고 저가 하고픈 대로 할 수도 있던데 그런 선택을 차마 하지 못한 건 내 성향 탓이다.
우선에 두어야 할 것이 근무지에서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잠시 고개 돌리고 숨 돌릴 수 있는 작은 선택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오늘 점심시간에 20분 남짓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감정의 변화가 느껴졌다. 빠른 걸음으로 운동 삼아 걷는 동료의 뒤를 쫓으며 그 와중에도 열심히 떠들었다. 실내엔 벽에도 귀가 있어서 차마 하지 못하고, 정작 잘못된 일에 관해서도 공동체의 안온함을 위한다는 핑계로 나를 낮추고 죽이며 살았다.
이 지긋지긋한 타입 루프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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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정리를 하는 게 가장 우선이다. 우리 짐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건져갈 만한 건 옷뿐이기도 하고. 계절별로 용도별로 옷을 분류하여 어떻게 챙기는 게 효율적인지 틈틈이 공부해서 11월부터는 짐도 조금씩 정리하고, 그 일에 기운을 쓸 수 있게 체력도 비축해야 한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여름옷을 드라이 세제로 정리한 것 외에 짧은 가을에 입을만한 옷도 결국 그렇게 세탁해야 할 것을 엊그제야 알게 됐다. 모르고 있었다기보다는 최대한 집안일은 미루고 미뤘다가 꼭 하지 않을 수 없는 것만 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우선순위가 계속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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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에어컨 필터를 교환하고 교체한 필터를 꽂고 소독약을 분사한 차를 세워둔 상태로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그 사이에 몇 번 봬서 낯익은 사장님께서 뉴스를 손에 들고 보시다가 한마디 하신다.
"이러다 나라 망하겠어요."
이 동네에서 종종 오가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그 또래 아저씨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잘했군 잘했어를 외치며 무슨 모임에 동원되어서 돈벌이가 쏠쏠하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한다. 자기 생각을 강요하듯 아주 큰소리로 방송을 틀고 바닷가 산책길에서조차 사람을 분해하듯 유심히 쳐다본다. 조금만 틈이 보이면 바로 무슨 말이라도 할 것 같아서 못 본척하고 나만의 투명 보자기를 쓰고 지나간다.
바바리맨이 자기가 노출한 부위를 못 본척하고 지나가니까 달려와서 근처에서 더 보란듯이 벗어 보이는 꼴을 본 다음에 그와 흡사한 강요증 환자와 길에서 마주치면 재빨리 숨을 고르고 내가 투명인간이라도 되어 지나치는 것처럼 내 주변에 물방울 모양의 투명 보자기를 펼친다. 물론 나의 적극적인 상상력을 이렇게 표현하는 거다.
이 정도 하면 아무도 나를 유심히 쳐다보지 않는다. 레이다, 안테나 같은 것의 스위치를 죄다 끄는 거다. 언젠가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도 하도 쳐다보는 사람이 많아서 그들 속에서 조용히 나를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혹은 기 빨릴 정도로 많은 사람 속에서 내 에너지를 뺏기지 않고 온전히 그 속에서 견디기 위한 일종의 보호막 같은 장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혼자 생각 끝에 만들어낸 것이 그런 투명보호막이다.
실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의지에 따라 종종 나를 유용하게 보호하는 장치로 활용한다. 영화 속에서 우주선에 에너지 보호막을 가동하듯 내 존재의 크기를 최소화하여 그런 보호막을 치는 적극적인 상상을 하는 거다.
그 바바리맨 같은 사람을 피하려고 동네 곳곳에서 사람과 마주치면 눈길을 주지 않는다. 쳐다보지 않고 투명인간처럼 그 사이를 지나간다. 내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부터 이미 투명인간이 되어 살고 있지만. 나는 이 좁은 지역사회에서 한 번만 봐도 기억할 만한 강한 인상을 가져서 아는 사람으로 인지하는 이가 더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부터는 더 조심한다.
딱히 나쁜 짓을 할 일은 없지만, 이 동네는 시내에서 두 번만 마주쳐도 아무개는 종일 시내를 쏘다닌다는 말을 할 정도로 남의 말 쉽게 아무렇게나 하는 사람이 흔한 곳이기도 하다. 몇 해 동안 이 동네가 아닌 곳에서 근무해서 지역 사람들과 마주칠 일은 동네 마트나 산책길 정도 외엔 없다.
이러다 나라 망하겠다고 말씀하신 그 분과 몇 마디 대화를 했다. 서비스 지정점을 바꿔서 그곳에 몇 번 들러서 이제 익숙해져서 좋긴 한데 거기서 투명인간이 되기는 어렵겠다. 부산에 있는 아들 보러 갈 때도 운전은 무서워서 버스를 타신다는 사무원은 여름에 봤을 때보다 얼굴이 영 핼쑥해졌다. 나도 그 사이 살이 많이 빠져서 인상이 달라 보이는지 예전처럼 말을 걸진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