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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3>

소리와 감정, 그리고 기억

by 자 작 나 무 2023. 12. 2.

 

2023-12-02

 

전석 초대권으로 열리는 음악회에 한참 전에 예약해서 잊고 있었는데 오늘이 그날이다.

어제 퇴근하고 삼천포에 다녀온 바람에 오늘은 몸이 좀 무거워서 움직이기 싫었다. 그래도 집안에 고여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게 낫겠다. 약속 없이 밖에 나가봐야 추운데 동네 마트 밖에 갈 데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세금으로 음악회에 초대해 주는데 당연히 가야지!

 

 

피아니스트 박재홍은 자신이 낳지도 않은 아기를 아주 능숙하게 잘 달래는 나이 어린 보모처럼 피아노를 능수능란하게 다뤘다. 얼마 전에 산책 나왔다가 음악당 실내에서 틀어주는 화면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섬세한 손놀림 뒤에 마치 허공에 색깔을 뿌려서 그러데이션 처리를 한 영상처럼 피아노 소리의 잔상이 그려졌다. 숨을 잠시 멈추고 연주자의 손끝에서 향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소리에 취할 수밖에 없었다.

 

찰랑찰랑 물결지게 손질한 머릿결이며, 아코디언 주름이 보일 듯 말 듯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차르르 떨어지게 맞춰 입은 연주복까지 이전에 본모습보다 한결 자연스럽고 예술가다워 보였다. 부드럽고 섬세하게 음을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게 돋보이는 연주였다.

 

 

 

처음 무대가 열렸을 때, 어린 음악가들의 열정 연주를 보게 되겠다고 생각했다. 입장할 때 악기를 들고 나오는 어린 학생을 보고 우선 환영과 격려의 박수부터 보냈다. 2022년 통영국제 음악제 초청을 계기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의 교원, 동문, 재학생 구성으로 결성되었다는 체임버 앙상블 K'ARTS 신포니에타의 연주는 그러한 내 선입견을 깨고 넘을 만큼 훌륭했다.

 

특히 R.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Metamorphosen)'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폐허가 된 독일을 보며 작곡한 슬픈 곡이라는 메모처럼 비통한 심사에 사로잡히게 했다. 곡을 해석하고 연주하여 전달하는 능력이 출중한 것인지, 음악이 내뿜는 감정적인 요소에 유난히 쉽게 사로잡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 곡 연주가 끝난 뒤에도 한참 감정이 굳어서 웃으면서 박수를 치기가 어려웠다.

 

같은 시대에 현재 진행 중인 전쟁은 과거에서 배우지 못한 이들의 무지와 욕망이 치밀하게 결집한 것으로 해서는 안 될 실수를 반복하는 거다. 전쟁은 인류 최대의 실수일 뿐이다. 어떠한 명분을 내세워도 무고한 생명을 무작위로 살상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 장막 뒤에서 사사로운 금전적 이득을 취하고 그 이득을 빌미로 더러운 돈을 버는 게 아닐까.

 

당장 끝내야 할 비극이다.

 

 

감정의 파도를 잔잔하게 가라앉히고 집에 가려고 근처 카페에 들렀다. 음악회 끝나고 어둡고 추운 집에 혼자 돌아가는 그림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로 노트북 열어서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지 않고 휘갈겨서 쓰고 닫아버리는 일기를 오늘은 종이에 썼다. 그 순간 감정이 넘쳐서 비워야 하는데 집에 가기는 싫고, 컴퓨터는 없고, 휴대폰으로 저걸 쓰기엔 어쩐지 갑갑했다. 늘 가지고 다니는 책과 종이, 펜이 혼자 노는데도 상당히 도움이 된다.

 

 

카페 옥상에서 보이는 풍경은 이 동네에 살면서 20년 넘게 혼자 가장 자주 걸은 길이다. 어두워진 바닷가에 불 켜진 광경. 혼자 가는 길에 쓸쓸해진 그림자를 돌아오는 길에 돌돌 말아서 달래서 집으로 돌아오며 한숨짓던 길이다. 이 길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카페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었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자리에 멈춰서 내려다볼 기회가 없었다.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되어서 조금 더 먼발치에서 지나온 길을 굽어볼 여유가 생긴 모양이다.

 

저 길을 걸으며 듣던 파도소리, 물 드는 소리, 바람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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