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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3>

낯가림(?)

by 자 작 나 무 2023. 12. 2.

어제 영화관 아래층 카페에 들어가서 주문하는 곳에서 키 크고 잘생긴 외국인 남자가 우리 뒤에 섰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 남자는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웃었다. 나도 화답하듯 살짝 부끄러운 듯 웃음으로 인사했다. 우리가 웃으며 인사할 사이는 아니지만, 먼저 활짝 웃음을 건네는 사람에게 굳이 무표정하게 모르는 척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런데..... 최근에 손님이 뜸할 시각에 혼자 자주 가서 음료를 주문하고 책 읽던 카페에서 자주 마주친 카페 주인과는 눈 한 번 맞춘 일이 없고 눈인사는커녕 '안녕히 가세요'라고 건넨 인사에 들릴 듯 말 듯 '네'라고 이상하게 답한 게 전부다. 카페 사장님은 일관성 있게 무표정했고, 나도 거울처럼 비슷하게 무표정했다. 웃으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굴었다. 주문할 때 손님이 없어도 키오스크로 주문하고 휴대전화로 알림을 받았다.

 

낯가리느라고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두고 쳐다보는 일이 거의 없다. 서너 번 봐도 말 걸지 않으면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한다. 처음 봐도 어떤 사람에 대해선 호의적이다. 사무적인 관계를 넘지 못할 사람과 친밀한 관계가 되어도 좋을 사람으로 구분하여 본능적으로 시선 방어벽을 치는 모양이다.

 

어제 리조트 카페에서 마주친 외국인 남자는 인상이 편안하고 좋아 보였다. 겪어보거나 말 한마디 섞은 적 없는 사람에게도 짧은 순간 감정적인 호불호를 감지하고 표현하는 이 뇌는 어떻게 최적화되어 있는지 나도 궁금하다. 내 뇌는 자의로 100% 가동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영역 밖의 것이다. 변형, 삭제, 첨삭을 반복한 기억의 껍데기와 다를 바 없는 자아는 얼마나 빈약한가.

 

그래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표현하는 게 별 의미가 없다. 

 

*

그 동네 일몰 시각 뒤에 본 하늘색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오늘 우리 동네 일몰과 비교해 보면 시시때때로 다른 것을 감안해도 확실히 아름다운 빛깔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창밖으로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면서 드라이브한 뒤에 도착한 바다가 보이는 영화관에서 기분이 좋은 것은 당연했겠다. 

 

많이 먹었으니 리조트 안에서 조금 걷자고 했더니 바람 불어서 춥다고 카페에 들어가자고 먼저 말한 건 딸이었다. 커피 마시지 않으니 카페에 들어가면 쓸데없이 돈을 많이 쓰게 된다고 카페 출입은 자제하는 편이다. 커피보다 딸이 주문하게 되는 다른 음료가 어디든 더 비싼 게 사실이니까.

 

그런데.......

음료를 주문하고 창밖 풍경이 잘 보이는 자리에 나란히 앉자고 했더니 다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연신 생글생글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아, 쓸데 있는 눈치는 없으면서 쓸데없는 눈치는 빠른 내 본능이 딸의 반응에서 이상 신호를 감지했다.

 

지난주에 윗동네에 볼 일이 있어서 2박 3일 다녀오는 길에 첫날 숙박한 숙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키 크고 잘생긴 남자'에 둘이 본능적으로 눈이 반응했다. 체크인하고 저녁 먹으러 나가는 길에 생긴 일이었다. 차로 이동한 뒤에 내가 먼저 한마디 꺼내니까 딸이 말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 인연을 만나지 못하면 외국 가서 만날 수도 있다는 말을 해서 국적이나 인종 상관없이 가치관이 비슷하고 서로 좋으면 문제없지 않겠냐고 답했다.

 

그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우리나라에선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는 키 크고 잘생기고 인상도 태도도 단정해 보이는 낯선 남자를 보고 웃음 띄는 딸이나 엄마인 나나 둘 다 눈이 자동으로 돌아갔다. 제어시스템을 작동하지 않으면 몸은 본능대로 반응한다. 그 이상의 뭔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순간 흠칫 놀랐다. 내 나이에 이래도 되나? 딸이야 청춘이지만...... 나는 왜 이러지? 상황에 따라 생각하지 않아도 반사적인 행동이 희미하게 나온다. 내 몸은 본능의 명령을 따라야 좋을지 이성의 명령을 따라야 좋을지 얼마나 자주 갈등하는지 조금 더 관찰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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