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 마시고, 다음 주부터 집에서 지내게 될 딸의 끼니를 손쉽게 해결할 방법으로 아보카도 몇 개를 사러 먼 길을 떠날 참이었다. 이상하게 동네 마트에서 산 아보카도는 제대로 익기도 전에 썩거나 갈라 보면 이상한 게 많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물건을 넣는지 알 수 없지만, 아보카도 상태가 가장 좋았던 매장까지 다녀올 계획이었다.
생각은 할 수 있지. 커피 한 잔 사러 나왔다가 변수가 생겨서 동네 공원에서 홀짝홀짝 커피를 마시다 보니 배가 살살 아프다. 직장에서 온풍기 바람과 먼지 섞인 공기 때문에 부어오르고 간지러운 피부 상태가 좋지 않아서 처방받은 약을 먹은 뒤에 속이 좀 쓰리더니 배가 아프다.
찍어 바르고 나왔는데 집에 그냥 들어가기 섭섭해서 시내로 방향을 돌렸다가 쑥 붕어빵 리어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아주머니께서 오늘 쉬시는 모양이다. 그다음 리어카는 중앙시장 건너편에 있는 풀빵집. 청각 장애가 있는 분이 사시사철 거기서 뭔가 구워서 파신다.
일부러 가지고 다니는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으로 풀빵을 샀다. 봉지가 아니라 종이컵에 담아주셔서 종이가 달라붙지 않아서 좋다.
날씨가 갑자기 며칠 따뜻해서 그런지 시내에 관광객이 넘쳐서 주차할 곳이 없다. 산 넘어가는 언덕길로 달렸다. 풀빵집에 들르기 전에 김치 김밥, 땡초 김밥을 샀다. 한때 자주 저녁 한 끼로 사 먹던 해저터널 나들 가게에 이름 내놓고 하는 김밥집 아주머니께서 아주 푸짐하게 속을 넣고 김밥을 말아주신다.
등산로 가까운 산길에 주차하고 풀빵부터 먹고, 너무 달아서 김치 김밥 한 개를 집어먹는다는 게 앉은자리에서 한 줄을 다 먹어버렸다. 예전보다 참기름 향이 줄었다. 땡고추 김밥은 매워서 결국 매운 고추를 빼고 먹었다. 역시 매운 건 극복하기 어렵다.
내 딸은 이상하게 풀빵을 좋아한다. 붕어빵보다는 풀빵이 좋다고 가끔 들먹인다. 달아서 머리끝이 진동할 정도지만, 맛있게 먹었다. 나선 길에 '해 뜨는 집'에 들러서 고추튀김도 사고 싶었지만 김밥 두 줄이 과해서 그럴 수는 없었다.
이제 이 동네를 곧 떠나면 아무 생각 없이 종종 들러서 사 먹던 익숙한 분식집도 추억 속에 남겠구나 싶어서 한 번 사 먹고 싶었다. '해 뜨는 집'은 내가 중학생일 때도 있었다. 그때 새색시 같던 분식집 사장님은 이제 꽤 나이가 드셨다. 그 분식집이 세병관 근처에 있을 때 꽤 먼 길을 걸어서 그 집에 친구와 떡볶이 먹으러 갔던 적도 있다.
그 건물 2층에 친구네 집이 있어서 놀러 가서 녹음한 테이프를 같이 듣기도 했다. 그 친구가 늘어진 테이프를 잠시 되돌리는 방법으로 냉동실에 테이프를 넣었다가 빼는 신박한 방법을 알려줬다. 무슨 노래인지 라디오에서 듣다가 녹음하고, 레코드 가게에 맡겨서 녹음하고, 듣다가 듣다가 테이프가 늘어지면 냉동실에 잠시 넣었다가 꺼내서 또 들었던 시절. 용돈이라곤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학창 시절에 친구 손에 이끌려서 분식집에서 뭔가 먹었던 기억이 오래 남았다.
학교 마치고 집에 가면 시멘트 포대처럼 큰 포대에 담긴 밀가루를 알루미늄 대접으로 퍼담아서 반죽했다가 부뚜막에 면보자기를 덮어놓고 우리를 기다리시던 어머니, 우리 4남매가 먹을 간식을 그렇게 만들어주셨다. 부풀어 오른 반죽을 손으로 슬슬 떼서 기름솥에 튀겨서 하얀 설탕에 묻혀서 내놓으셨다.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주는 간식을 먹는 게 좋아서 학교 마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가끔은 흰 설탕이 묻어있고, 어떤 때는 물엿이 묻어있었던 밀가루 튀김은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도넛' 우리 엄마표 도넛이었다.
나는 꽤 오래 직장에 다니지 않고 살아서 집에서 간식을 만들어놓고 기다리는 엄마로 살 수 있었다.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지 느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간식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딸의 입을 행복하게 해 준 것은, 유년 시절 우리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고 배운 것이었다.
풀빵 파는 리어카 자리 근처, 지금은 사라진 건물에 그 분식집이 있었다. 이 모든 기억은 내 일기장에 기록되고 사라질 것이다. 한 가지씩 좋았던 기억이 떠오르는 봄날 같은 12월의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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