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5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동네 친구집은 해저터널 앞에 있는 슈퍼마켓이었다. 일곱 명의 딸 중에 셋째였던 내 친구는 키가 크고 명랑한 성격에 운동을 잘했다. 가족이 많아서 집 두 채에 나눠서 살아서 가끔 친구네 별채에서 놀기도 했다. 유일하게 자주 놀러 가는 친구집이었고, 유일하게 내 속을 다 드러내 보이던 친구였다.
오늘은 그 친구가 그대로 고향집에 산다면 우리만의 아지트 같았던 친구네 별채에서 온갖 수다를 다 떨고 간식도 잔뜩 먹고 실없이 웃고 떠들다가 한숨 자고 깨면 이전에 있던 일은 전생의 일처럼 다 잊고 편안해질 수도 있을 텐데.....
내 나이 열살 이전이었을 때부터 그 친구가 세상을 뜬 서른세 살이 되던 해까지 내 유년시절의 많은 추억을 함께 나눴다. 그 친구가 가고 없으니 학창 시절의 소소한 추억은 다 잊고 말았다. 가끔 만나서 친구들 이야기 나누며 주기적으로 수다를 떨었더라면 꽤 재미났던 추억거리 몇 가지는 아직도 되새김질했을 텐데.....
어쩔 수 없었다. 친구가 세상을 일찍 떠나버려서. 그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내밀한 감정까지 나누기엔 너무 커버린 뒤였어도 농축해서 내 인생에서 겪은 큰 일을 종종 터놓았다. 그렇다고 그들과 오래 우정을 나눌 친구가 되지는 못했다. 같은 동네에서 몇 발짝만 옮겨도 친구네 집을 지나칠 수밖에 없는 좁은 동네에서 오며 가며 자주 보며 정든 것처럼 소소한 삶의 순간을 자주 나눌 사람을 만나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되었다.
딸이 아주 어릴 때 살던 바닷가 골목 끝 집에서 골목을 빠져나오면 바닷가 앞에 있던 동네 놀이터에서 만난 나현이네 가족이 이후에 생긴 가장 오래된 친구다. 김장철에 김장하면 우릴 꼭 불러서 수육 삶아내서 새 김치를 맛보게 해 줬다. 그렇게 맛본 수육과 김치맛에는 사람의 정이 묻어서 더 맛있었다는 걸 내 딸도 알 거다.
고향에 그대로 살았더라면 언제 김장하는지 알아뒀다가 수육거리와 과일 좀 사서 집에 놀러 갔을 텐데.....
낮에도 구름 잔뜩 껴서 어둑한 하늘을 보며 일없이 또 그립다. 일찍 세상을 떠난 단짝 친구며, 내가 고향을 떠나서 한 번 만나기도 힘들어진 고향 친구며, 그들과 나눴던 소소한 행복과 따뜻한 감정이 온몸에 끼얹어져 그 향내가 한동안 빠져나가지 않게 꽁꽁 여미면, 이곳에서 보내는 두 번째 겨울에 추워도 발이 얼지 않을까.
어쩌다 스치는 사람은 순간 아무런 추억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진득하게 시간을 두고 오가며 진짜 마음을 나눈 친구는 모두 남쪽에 산다. 거울 너머 충혈된 퀭한 눈에 물기가 번져도 뚝 떨어져 내리지 못하는 눈물을 꾹 삼키고 있는 나는 얼마나 지나야 이런 적막한 감정을 넘어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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