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섬 <2003~2009>/<2005>

어떤 시선 <미완성>

자 작 나 무 2005. 7. 27. 00:05

호흡을 고르고 가만히 앉아서 눈은 감은 듯 뜨고 있는 듯 시선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 눈길 그 끝에 머문 자리에 끝없이 나고 드는 생각이 창을 넘어 산란하여 공기 중에 떠도는 빛처럼 분분히 흩어졌다 모이는 것이다.

 

처음 참선이란 걸 했을 땐 앉은자리에 시선을 어딘가에 두는 것이 불편했다. 자꾸만 눈을 감고 싶었다. 시선을 둔 자리에 마음이 옮겨가지 않고 그대로 내가 그 시간 속에 몰입하여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하여 끝없이 나를 물고 늘어져 끝내 생각 생각만으로 만들어진 내가 아닌 나를 찾아야겠었서 그렇게 앉아 있던 여름, 그땐 열여덟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수박 겉핥기 밖에 할 수가 없어 참선이란 것의 맛을 알 수가 없었던 그때에도 무언가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발견하지 못한 은하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하게 부정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정신영역 내에서 감지될 수 없고 인지할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고 믿었다.

 

신이 없음을 증명할 수 없다면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와 막연하지만 강렬했던 직관이 그 후 10년을 꾸준히 버텨주어서 내가 발견하고 싶었던 것은 찾았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에서 고독하고 외로운 것은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형벌 같은 것이며 또한 그로 인해 끝없이 갈구하는 사랑을 소중히 여기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후, 나는 지독한 회색빛 자리를 털었다. 우울하면 우울한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그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음에 대한 고마움을 순간순간 느낄 때도 있어서 마냥 그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어릴 때 나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다. 평범한 것처럼 어려운 것도 없다. 쉬운 것 같지만 평범하다는 것이 가장 무난한 인생을 살아가는 척도라고 생각했다. 평상심으로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 이상의 특별한 것은 가끔 마른하늘에 번개가 치는 것처럼 순간의 섬광일 뿐이다.

 

순간의 섬광, 그것으로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내 소중한 인생을 소모하고 싶진 않다. 존재에 대한 의문을 접고 난 뒤 한동안 세상살이에 적응하지 못해 슬프고 아프고 힘든 감각이 무뎌진 채 내 인생을 신에게 바치듯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남의 인생을 뒷받침하는 희생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하고 살아보아도 나만큼 중요한 존재가 없는 것이다. 내가 있어야 타인도 있고 세상도 존재하는 것이다. 역으로 우주가 존재하고 지구가 존재하고 인류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만큼 내 삶의 중심은 분명히 '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를 제대로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다만, 생물학적인 섭리대로 유전적인 형질을 승계받은 부모의 분신이 '나'라면 내 삶은 응당 부모의 삶에 예속되어야 옳을 것이다. 부모는 나에게 세상에서 존재할 수 있는 기초공사를 해준 은인일 뿐이다.

 

유토피아는 인간의 이상적인 욕망의 결정체와도 같다. 후천개벽이나 기존의 인류가 저질러온 시행착오나 잘못들을 질타하여 모든 어둡고 질척한 것들 뒤집어엎고 인류를 구원할 절대자를 신봉하는 신인류들만 갈등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는 감언이설은 내겐 참으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말이다.

 

그 말에 현혹될 수가 없어 나는 종교적이지도 못하다. 그렇다고 무신론자도 아니다. 신은 존재한다. 다만 인간의 생존과 삶을 멋대로 좌지우지하는 절대자는 없다.

 

* 여기까지 쓰다 말았는데 손놓은 다음엔 도무지 한마디도 덧붙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