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1코스 시흥리와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2월 22일 여행 셋째 날
올레 1길을 걷기 위해 제주시에서 성산 방향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 넘게 달려서 시흥리에서 내렸다. 버스정류장에서 시흥초등학교 방향으로 걸어야 하는데 반대쪽으로 걷다가 다시 제 방향을 찾았다.
검은 밭 위에 당근을 수확하고 남은 자투리들이 널려있었다.
우리가 잘못 든 길, 마당이 열린 집에서 누렁이가 새끼들 젖을 먹이는 걸 보게 되었다. 어릴 때 우리 집 마당에서도 숱하게 보던 장면이다.
강아지가 젖 먹는 걸 처음 보는 딸이 가까이 가서 보겠다고 다가가니 어미가 고개를 돌렸다. 내 딸이 가장 좋아하는 순진무구한 표정의 '똥강아지'다.
마트에서나 볼 수 있는 귤이 떨어져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제주의 소박한 시골 풍경이 정겹다.
당근밭엔 까치도, 참새도 포로롱 왔다가 뭔가를 물어가곤 한다.
반대방향으로 길을 잘못 잡은 걸 알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다 보니 좀 전에 어미젖을 먹던 강아지가 도로에 나와 주저앉아 있다. 저 포동포동한 앞다리가 너무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다. 눈꼬리가 살짝 내려간 저 눈매는 또 얼마나 귀여운가.
찻길이라서 위험하니까 들어가라고 손짓을 해줘도 말썽꾸러기 아가처럼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 꼼짝을 하지 않는다.
딸은 저런 강아지가 너무 귀엽다며 눈을 떼지 못하고 싱글벙글 좋아한다.
강아지 한 마리가 딸 옆에 와서 콩콩 냄새를 맡더니 쫄랑 쫄랑 따라온다. 내 딸은 그게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며 입이 귀에 걸렸다.
시흥리 정류소로 되돌아와서 시흥 초등학교 방향으로 조금 걷다보니 올레 1코스 시작 지점이 보인다. 일단 안내센터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스탬프를 찍고 어슬렁어슬렁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늘이 잔뜩 흐려서 언제 비가 뿌릴지 모르는 날씨다.
무밭이 산 아래까지 이어져 있다. 무생채, 무국, 무조림, 무나물..... 무밭을 보고 계속 무를 넣어서 만드는 음식 이야기를 하며 깔깔거리며 걸었다.
배가 슬슬 아프기 시작해서 꼭 화장실에 갔으면 하는 즈음에 다행스럽게 올레길 안내소가 보였다.
화장실을 쓰고 안내소로 가보니 월요일은 쉬는 날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비가 금세 쏟아질 것 같으니 산길은 걷지 말자고 딸이 나선다. 혼자 매어있는 개가 우릴 보고 낑낑거렸다. 왜 저런 소리를 내느냐고 묻는 딸에게 심심한데 우리가 왔다가 금방 가는 게 아쉬워서라고 말해줬다.
지나는 길목에 있던 펜션 강아지 이름이 캐빈인가 보다. 캐빈이가 여유로운 자세로 가만히 앉아서 물끄러미 우릴 쳐다봤다.
그리곤 되돌아가는 길에 올레길을 걸으러 온 청년 셋이 우리 앞을 지나가며 인사를 건넸다. 아주 반갑게 웃으며 건네는 인사는 흐린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분을 들뜨게 했다. 누군가 여행길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해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여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20대에 혼자 버스나 기차를 타고 여기저기 다닐 땐 멀리 가는 버스 안에서나 기차에서 옆자리에 앉게 되는 낯선 여행객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어쩐지 낯선 사람들과는 눈길조차 마주치는 일이 없어졌다.
멀리 오른쪽으론 성산일출봉이 보이는 길목에서 푸릇한 밭을 배경으로 기분이 좋아진 딸이랑 셀카봉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사진 몇 장 찍고 나니 바로 비가 쏟아졌다. 가방 안에 든 우산을 꺼내서 쓰고 어딘가 춥지 않고 바람이 덜 부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 가기로 했다. 시흥리 주차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환승버스역까지 간 다음엔 택시로 이동했다. 그런 한산한 동네엔 카카오 택시도 거의 오지 않는데 마침 기사분이 근처에 손님을 내려주고 돌아가려던 길에 호출을 받아서 온 것이라 했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무를 가득 싣고 가던 트럭 짐꾸러미 묶은 것이 풀어져서 실려있던 무들이 밖으로 떨어져서 길 위에서 박살이 나버렸다. 트럭기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길 위에 깨진 무를 내버려 두고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떠나버렸다.
길가에 문득 문득 한 그루씩 선 매실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다. 아직은 추운데 곧 봄이라고 매화가 환하게 웃고 있다.
언젠가 한 번 가봐야지 했지만 그동안 제주에 오갈 때마다 다른 코스에서 우선순위에서 밀리곤 하던 곳이다. 걷는 여행이 아니었으면 또 다음으로 미뤄졌을지도 모를 두모악에 드디어 왔다.
이 마당에 푸른빛이 돌 때 다시 와보고 싶다. 딸이랑 한 번 왔으니 이젠 혼자라도 좋겠다.
1957년 충남 부여 출생인 김영갑은 1982년부터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사진 작업을 하다 1985년에 섬에 정착했다. 섬에서 생활하던 중, 어느 날 루게릭 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그는 투병 생활을 한 지 6년 만인 2005년 5월에 두모악에서 잠들었다.
버려진 초등학교를 구하여 손수 작업하여 만든 갤러리 두모악은 2002년 여름에 문을 열었다 한다.
제주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담긴 그의 사진들을 보면서 비 내리는 제주의 오후 한 나절을 보냈다. 음악과 따뜻한 차가 있었으면 더 좋았으리라......
말없이 자리를 옮겨가며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감상하며 사진 속에서 읽어지는 어떤 느낌들에 사로잡혀 그리 넓지 않은 전시실을 한 바퀴 더 돌았다.
돌하르방 사진사와 한 장 찰칵~
전시회장 뒤편에 마련되어 있는 무인 찻집. 비 오는 날이어서인지 빈자리가 없었다.
창가에서 엽서를 쓰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도 모르게 뒤뜰 사진 찍는 척하며 그를 내 카메라 속에 담았다
비에 촉촉하게 젖은 마당을 길이 난대로 이리저리 걸어보았다.
예술가의 남다른 열정이 갤러리에 담긴 사진 속에서 진하게 느껴졌다. 사진도 묘한 느낌이란 것이 있다. 사진 속에서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는 사람의 성정과 세상을 보는 시각, 사람을 보는 온도를 읽게 된다. 그냥 아무렇게나 같은 곳에서 찍은 사진이라도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이 찍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느낌을 준다.
문득 혼자 제주에 가게 되는 날이 온다면 갤러리 두모악에 다시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