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쌓인 잡담
일을 손에서 놓고서부터 수학 문제 풀기를 멈추게 되었다. 십수 년간 나는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수준의 수학 문제를 반복해서 풀었다. 30대에 하던 것보다 40대가 되어 더 수학 공부가 쉽고 좋아졌다. 자주 해서 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30대엔 몸이 많이 아파서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40대가 된 후에 딸이 10대 되고, 함께 놀고 대화도 많이 하다보니 내 삶이 더 풍성해지고 집중력도 더 좋아졌다.
두어 달 숫자가 적힌 책 한 페이지도 안 열어본 것 같다. 언제 수학문제를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사이 내 머리 속에 균형감이 깨지고 평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머리가 돌기 시작했다. 20대에 치기어린 감정들을 다스리느라 썼던 감성적인 글들이 머리 속에 노래 가사처럼 떠오른다. 마치 내가 연애소설 작가라도 되는 것처럼 온갖 소설의 모티브들이 둥둥 떠다닌다. 그동안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보다.
꽤 오랫동안 집 밖으로 나설 때는 메모를 할 수 있는 종이와 필기구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게 된 이후로 나도 모르게 필기구를 챙기는 것을 잊게 되었다. 얼마 전부터 문득 문득 그 종이와 필기구가 절실해지는 순간들이 반복적으로 생겼다. 물론 그렇다해도 예전처럼 매끄럽게 단숨에 생각나는 대로 옮긴다고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만큼은 아닐 게 분명하다. 그래도 생각이 넘칠 때 흘려버리는 것보다 기록해두고 싶다.
어느 순간 아주 사소한 자극에 뇌가 반응하여 응축된 생각이나 평소에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 마구 떠오른다. 그럴 때 어쩐지 다시 살아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그동안 나는 너무 자신을 억눌러온 것은 아닌지. 내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습의 일부가 그대로 발현되도록 놔둬도 큰 문제는 없을텐데 엄마로서의 자리, 일을 할 땐 학교에서 만나는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뭔가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조금씩 더해져서 나를 더 움츠리게 하여 내 머리가 부담감으로 억눌린 상태였나 보다.
뭔가 생각날 때, 조금씩 기록해두려 한다. 이 많은 생각도 언젠가 가뭄처럼 말라버릴 날이 있을 것이다. 바람에 찬 기운이 가시기 시작한 순간부터 내 마음엔 봄바람이 들었다.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꽃길을 걷고 싶어졌다.
그런데 내 속에 있는 누군가 내 마음과는 다른 말을 한다.
'뚱뚱해져서 맞는 원피스가 없으니 너는 안 돼!' 금세 주눅든 나는 방 바닥으로 몸이 꺼져들어가고 깊은 한숨을 쉰다.
숨결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호흡이 얕고 가늘고 생각이 희미해지고 진공상태로 들어간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뭘했는지도 모르는데 훌쩍 시간이 지나가버렸다. 특별히 잘한 것도,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다. 잘했다, 좋다가 아니라 나쁘지 않다로 눈을 감아버린다.
의미없는 잡담이라도 털어버리면 가벼워지겠지......
새로 산 원두만 갈아서 커피를 내려보니 좀전에 실수로 그라인더에 남아있던 엊그제 마시던 원두 간 것이랑 섞인 커피 맛과 비교해서 더 낫진 않다. 결국 신맛 많이 나서 별로라 생각하던 커피와 새로 산 원두 두 가지가 섞여서 내 입에 괜찮다고 느꼈던 것이다. 두 가지 적절히 섞어서 마시면 되니까 더 잘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