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작 나 무 2018. 8. 29. 22:07

2004/10/04 02:23
관념일 뿐인 관념과 정신의 영역에 자리만 차지하는 괴물 같은 지식을 탑재하는 항구에는 정박하고 싶지 않다. 멀리서 불빛을 보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그것이 깊은 뿌리 없는 잔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면 쉽게 떠난다. 

 

사람들이 매료되는 여러 종류의 지적 부유물 중에 가끔은 겉멋에 취한 발림도 있다. 내가 피울 수 없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가끔 묘한 눈빛으로 허공을 한 번씩 주시하던 혹자의 반항기 섞인 시선을 멋있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다. 나와는 다른 색채를 가진 사람의 향기를 쫓아 넋 나간 듯 쳐다보다 질투와 부러움이 뒤섞인 시선을 감추려 애썼던 적이 있었다. 

 

정체성 없는 껍데기 지식인의 유창함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어도 현혹할 수는 있다. 문학이라는 이름을 내세우고 글과 글 사이를 교묘하게 연결해 자기 것인 양 자판기 커피를 멋진 머그잔에 내어놓는 멋쟁이(?)들이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다고 하여도 그들의 정신이 어딘가 발견되지 않은 이름 모를 들꽃 한 송이의 매력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나는 여전히 고집불통이다. 

 

설령, 내가 이해할 수 있다 하여도 다소 어렵고 고상한 말들만 사전이나 책 속에서 골라내어 장식한 글들을 읽으면 메스껍다. 내가 아는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 단어만 쓰겠다 생각하고 책 읽는 것조차 언어나 지식 수집의 차원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여겨왔는데 요즘은 심한 갈증을 느낀다. 

 

보편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생각과 생활에 가까워지고자 하였던 것이 오히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언어와 감정과의 분리나 고립과 편협한 자아를 생산해내고 말았다. 이웃집 사람과 차를 마시다 내가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두 손으로 찻잔을 받쳐 들고 마시는 것이나 수구에 물을 적당히 식혀 다관에 붓는 것이며 지극히 차를 마시면서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내 몸짓에도 그녀는 대뜸 거북함을 표현했다. 

 

차를 마시는 절차가 너무 가식적이고 복잡하여 차 문화가 대중적이지 못하다는 말을 꺼냈다. 나는 어떻든 입맛에 맞으면 마시면 된다고 생각해왔는데 어떤 잔에 마시거나 어떤 자세로 마시건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로 하는 것이라 여겼던 것도 익숙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가식과 불편함으로 다가왔을지 모를 일이라는 것을 그 말 한마디로 되뇌게 되었다. 

 

단지 취향이 달라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것이 거북하거나 거리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블로그를 하면서도 나는 가끔 그런 기분을 느끼곤 한다. 그저 자기 생각과 감정과 그 외의 것들을 표현하기 위한 적절한 도구적 차원에서 끌어다 쓴 단어나 인용한 글이나 음악, 그림 등을 대하면서 내게 익숙한 문화가 아닌 것은 그냥 스치거나 건너뛰어 버리곤 했다. 많은 것들이 내가 의미를 둘 때  빛나지만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별들의 아름다움도 있기 마련이다. 

 

나는 항상 내 머리 위에 보이는 하늘만 바라보고 내 눈에 빛나는 별들만 아름다운 것이라 여겨왔으나, 외도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러나, 깊이 나를 흔들만한 것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마당에 나가 별을 보다 어느 별 하나를 오래도록 쳐다보았고 나도 모르게 그다지 밝지도 않았던 그 별빛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별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가 유심히 바라본 별이었기 때문이었겠지만, 나는 다시 별빛이 그리워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의 영혼처럼 다양한 별 하나하나를 마음의 문을 열고 매일 밤 여행하고 싶은 충동이 문득 바람처럼 일어온다.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을 때도 별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간혹 잊고 산다. 

 

그만큼 흔들리는 삶의 파편과 빈약한 자아에 몰입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 심각한 편식증을 완전히 고칠 수는 없겠지만 귀와 눈을 열어놓아야 할 때가 되었으니 세상과 사람과 우주로 열린 일방통행의 통로를 조금 더 넓게 열어보려 한다. 가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