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일
단순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어떤 지지부진한 선택을 할 때엔 저변에 깔린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차량용 방향제를 선물 받았다. 내일 퇴근한 뒤에 같이 극장에 가자고 하는데 기회 있을 때 가야 하는 거겠지.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여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20년 남짓 딸과 함께 하는 전유물 같은 거였다.
앞으론 같이 가자는 사람만 생기면 그냥 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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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잠시 공상할 시간이 생겨서 설레는 일을 생각해봤다. 조수미 씨가 하루에 1,500만 원짜리 스위트룸에 묵는다는 인터넷 뉴스 제목을 봤다. 나는 하루에 15만 원짜리 호텔방이라도 잘 예약해서 한 달은 돌아다니고 싶다.
노르망디 해변의 에트르타, 파리의 박물관, 미술관, 에펠탑 근처 잔디밭에 자리 펴고 누워서 멍 때리기 등등 온갖 여행과 관련한 상상을 했더니 절로 웃음이 났다. 그리고 구체적인 코스가 그려지면서 감정이 요동쳤다. 내년엔 딸이 바쁘니까 어렵겠고, 그다음에 어떻든 기회만 생기면 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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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마트에 마감 날짜가 임박한 상품권을 쓰러 간다고 생각했는데 도착해서는 까마득하게 잊었다. 거의 주스 수준의 연한 레몬 맥주 트롤 브루 한 캔 사고 통통한 표고버섯 한 봉지를 샀다.
집에 돌아와서 씻고 마시려고 맥주를 냉동실에 넣었다가 까먹었다. 조금 전에 생각나서 부풀어 오른 맥주 캔을 꺼내놨다. 표고버섯은 부침가루 묻혀서 톡톡 털어내고 달걀물 입혀서 노릇하게 부쳐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내 입엔 고기보다 버섯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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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약속한 그날이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때는 싫은 것을 억지로 해줬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부탁을 에둘러 거절했는데도 부탁해서 마지못해서 했다. 그리고 제때 돌려받지 못했다. 이제 좀 화난다.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내가 몹시 곤란해졌다고 문자를 보낸 게 전부다. 내게 필요 이상의 것을, 아니 결코 해서는 안 될 부탁을 하다니. 몹시 불편하다. 휴대폰을 꺼놓으셨네. 타인의 처지를 이렇게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가족을 도와야 한다는 건 과한 집착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분인 것은 알지만, 이런 경우 없는 일을 벌이는 것은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