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다솔사
6월 25일
나름 3사 순례 세 번째 사찰은 봉명산 다솔사.
적멸보궁이 무엇인지 딸에게 설명해주고, 진신사리탑 주위를 돌며 마음을 모아보라고 일러줬다. 겨울에 치를 시험 앞두고 불안해 하는 딸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내가 함께 정성을 쏟는다는 것을 보여주며 기운을 채워주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함께 걸었다.
이 계단 아래 한쪽 자리에 큰 나무 아래에 나이가 꽤 드신 아주머니께서 비 오는 데 작은 파라솔 하나 펼쳐놓고 앉아계셨다. 마을에서 꽤 떨어진 자리인데 밭에서 직접 키워서 들고 오신 것 같은 토마토와 오이 몇 무더기 놓고서 비 오는 날이라 지나가는 사람도 드문드문한데 굽은 허리를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시는 모습이 눈에 밟혀서 그대로 갈 수가 없었다.
한 대야 담아놓은 토마토가 실하고 좋기는 한데 양이 너무 많다.
"반만 파실 수는 없으신지요?"
안 된다고 손사래를 치신다.
"그럼 그냥 다 주세요....."
검은 봉지를 하나 꺼내서 주섬주섬 토마토를 담으시다가 몇 개 남기신다. 5분의 4 정도 분량만 담아주시는 거다.
"왜 그거 몇 개는 남기고 주시는 거예요?"
"이거.... 많잖아..... "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어서 내가 반값에 반만 달라고 하시는 줄 알고 담아주시는 게 그렇게 양이 많은 거였다. 어차피 몇 개 더 받아가도 혼자서 며칠 안에 다 먹지도 못할 양이다. 그래도 기분 좋게 마수걸이해드리고 싶어서 처음 부르신 값에 한 소쿠리를 다 받아왔다.
시장에 가끔 가면 아이 데리고 온 여자가 마수걸이해 주면 장사 잘 된다고 간혹 불러 세우시는 분들께 들은 게 있어서 다 컸거나 말거나 나도 딸 데리고 나왔으니 비슷한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깨가 묵직하게 무거운 토마토 봉지를 들고 차에 탔더니 딸은 기숙사에서 그런 거 씻어서 해 먹을 수 없으니 내가 다 가져가야 한단다.
"토마토 달걀볶음도 해 먹고, 갈아먹고, 샐러드 해 먹고, 또 뭐가 있지.... 바질 페스토 발라서 그냥 썰어서도 먹고..... 엄마는 며칠 동안 토마토만 먹어도 다 못 먹겠네."
집에 토마토를 비롯해서 식재료가 많을 텐데 왜 토마토를 또 사는지 딸은 잘 모르는 모양이다.
신라시대에 창건한 사찰에서 기원하고 옮긴 이야기며, 이 터에 고관대작들이 더는 조상의 무덤을 만들지 못하게 임금님께 상소하여 받은 봉표 이야기를 건넸다. 절 앞 숲길을 함께 걸어보고 싶었다. 우산 위로 비가 가볍게 내려도 숲은 습기를 머금고 몸이 축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더는 권할 수 없는 걸음이 나는 아쉬워도 동행한 사람이 있으면 거기에 맞춰야 하니 더 걷자고 할 수도 없다.
돌아 나오는 길에 딸이 말한다.
"이 광활한 우주에 티끌 같은 존재인 인간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아무 의미도 없는 하찮은 존재가 아닐까..... 도대체 어디에 의미를 두고 살아야 하지?"
우리가 절에 들렀다 나오면서 나는 많은 대화 끝에 딸이 내게 던진 물음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찾아봐.... 그게 뭔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며 그 길을 벗어났다.
뇌를 병렬로 연결하는 이야기, 딸내미 후배와 나눈 재밌는 이야기, 아주 오래전 여행지에서 먹은 음식 이야기..... 참으로 다양하고 많은 이야기를 오가는 차 안에서 나눴다. 우리가 함께 하는 여행은 그래서 더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혼자는 느낄 수 없는 특별한 시간에 감사하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