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작 나 무 2023. 11. 20. 20:02

2032-11-20

 

어릴 땐 경험할 수 있는 것에 한계가 많았다. 틀 안에 갇힌 생활을 하면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역은 내 정신세계뿐이었다. 물론 그조차도 읽거나 배운 지식의 틀 안에 다시 갇히기도 했으나, 나를 단정적으로 한계 짓는 것에 거부감이 있었다.

 

그 시절에 유일무이한 자유의 세계를 넓히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요즘은 혼자 노는 것의 한계 때문에 책을 읽는다. 심심하고 같이 놀 사람 없어서 책 읽었던 어린 시절과 별 다를 바 없다.  토요일에도 책 한 권을 받았고, 오늘도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책 한 권이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용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뇌과학자들이 쓴 책이 흥미롭다. 

 

사은품으로 받은 수면 안대를 쓰고 일찍 잠들 가능성이 많은 하루를 보냈다. 어제 걱정한 것보다는 덜 힘들게 하루를 살았다. 혼자 밥 먹고, 혼자 3분 코스 산책을 하고 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비인간적인 이런 일과가 내게 부추긴 통증이 오늘은 견디기 힘들 정도여서 퇴근길에 병원으로 내달렸다. 5시 넘었다고 접수를 해주지 않는다는 병원에서 주차하고 접수창구에서 시간을 약간 보내고 곧장 다른 병원을 찾아갔다. 다행히 6시 전에 도착해서 급히 진료받고 처방전을 받아서 나왔다.

 

병원에 들어가기 전에 '쑥 붕어빵 2마리 천 원'이라는 글씨에 눈이 돌아갔다. 쑥향이 나는 붕어빵이라니..... 아주 어릴 땐 그리 좋아하지 않던 조합인데 어쩐지 아련한 향수가 느껴지는 맛일 것 같다. 병원 갔다가 나오니까 붕어빵 리어카는 정리한 뒤였다. 다음을 기약하고.....

 

집에 와서 어젯밤에 떠올린 채소 튀김을 만들었다. 무가 제철이어서 며칠 전에 한 개 샀다. 엊그제 김치찌개 만들면서 꽤 넣어서 무조림인 듯 일부 먹었다. 그리 크지 않은 무를 샀지만 양이 많아서 무가 그대로 식탁 위에 남아 있었다. 무나물 만들 때보다 조금 얇게 썰어서 동글동글한 무를 그대로 전분을 살짝 묻힌 다음에 가지 튀김할 때 만든 튀김옷을 얇게 묻혀서 튀겼다.

 

가지부터 한 개 썰어서 튀기고, 2차는 무 튀김, 3차는 마른 가루만 입힌 고구마 한 개를 튀겼다. 튀김 3종 세트가 쉴 새 없이 입으로 들어간다. 오늘은 가지 튀김보다 생전 처음 만들어 본 무 튀김이 훨씬 맛있다.

 

고구마는 그 자체로도 달아서 납작하게 썰어서 튀겨놓으니 머리끝까지 확 치고 오르는 단맛이 느껴져서 놀라울 정도였다. 요즘 내 입은 단맛이 극도로 진하게 느껴져서 조금만 달아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곤혹스럽다. 쓴 커피도 끝맛이 달게 느껴질 정도다.

 

항생제 주사에 처방 받은 약까지 한 봉지 먹겠다고 손에 잡히는 대로 채소 튀김을 만들고 단맛을 가라앉히려고 고춧가루 넣고 파 팍팍 썰어놓고 라면도 끓였다. 엊그제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둔 김치찌개 일부를 덜어서 같이 넣어서 끓였더니 라면도 맛있다. 이미 시작했으니 달걀도 하나 톡 깨서 넣었다. 대신 면은 3분의 1은 남기고 삶았다. 언제 또 이만큼 입맛이 좋을까 싶으니 이럴 때라도 먹어야겠다.

 

어제만 해도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했는데 손바닥 뒤집듯이 감정은 제멋대로 춤춘다. 오늘은 피곤한 몸을 위해 책은 몇 장만 읽고, 그냥 안고 자야겠다. 손만 대고 있어도 책 안의 내용이 머릿속에 확 들어오던 때도 있었는데 이젠 집중해서 정독하지 않으면 무슨 내용인지 돌아서면 잊게 된다.

 

드라마나 영화 볼 때 내가 직접 겪는 일이 아니므로 꿈처럼 시뮬레이션의 일종이라고 여겨서 돌아서면 영화 줄거리 외엔 거의 다 잊는다. 그 순간 외엔 기억이 유효하지 않다. 꿈도 그러하다. 그런 코드로 가볍게 흩어진다. 요즘은 내 삶도 대체로 그러하다. 기록하지 않으면 잊는다.

 

삶도 꿈인듯 가볍게 흘린다. 한 번 가 본 골목길 모퉁이에 있던 전단지 한 장까지 잔인하게 기억했던 시절의 삶이 그다지 유용하거나 행복하지 않았던 때가 많았다. 잊는 방법을 찾으려고 얼마나 애썼던가. 나이 들면 이렇게 자연스레 잊히고, 기억하고 싶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투성이인데. 

 

 

*

그대도 나를 잊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