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섬 <2003~2009>/<2003>
운명의 여신이여
자 작 나 무
2003. 8. 13. 13:53
2003. 8. 13
한동안 다양한 장르를 고루 들어보려고 정리해놓은 음악 파일 일부를 선곡해서 기분에 따라 들을 수 있도록 해놓고 그것을 거의 반복적으로 들어왔다. 자주 들어가던 세이캐스트 음악 방의 반복적 선곡에 싫증을 느낀 후론 늘 내가 듣고 싶은 충동이 이는 곡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서 듣는다.
며칠 들끓어 오르는 감정을 조율할 음악을 찾지 못하다 언젠가 폭발하듯 강렬할 도입부를 가진 음악을 찾다 사다 놓은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를 꺼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처럼 합창이 들어간 부분이 있는 곡이다. 레퀴엠을 듣다 감정이 수그러들었다 다시 격앙된 순간 불같이 끓어오르는 욕구를 채워줄 만한 곡으로 달리 손에 잡히는 곡이 없어서였다.
볼륨을 제법 높여놓고 창을 닫았다. 제1 서곡은 가슴을 쿵쿵 치는 듯한 북소리와 함께 반복되는 가사, 박자가 빨라지면서 합창 부분이 강해지는 탓에 볼륨을 높이면 짧은 순간 강렬한 도취가 가능하므로 귀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 볼륨을 높이게 된다.
음반이나 그림이나 내게 전문적인 지식은 전무하다. 그저 느낌대로 끌리는 대로 좋으면 듣고 좋으면 보는 정도. 최근에 자주 듣던 테마로는 이 갑갑한 마음 충동적인 기분들을 차분하게 조율할 수 없어 다시 찾게 되는 것이 클래식이다.
두 번을 반복해서 듣는 동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격한 감정에 눈물을 흘리고 나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처럼 음악이 주는 카타르시스도 대단한 것이다.
며칠째 여전히 잠이 부족하다. 그런데도 낮잠을 자는 일은 드물다. 아이에 대한 생각을 떨구고 혼자일 수 있는 시간 동안 뭔가 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아이가 자는 동안 생각의 흐름을 쫓느라 밤을 새우거나 하는 경우가 잦다.
낮엔 밤에 느낄 수 있는 부분만큼 섬세한 감정의 흐름을 탈 수가 없기 때문에 글을 쓰더라도 맘 같지가 않다. 현실적인 생각에 이끌리면 글은 샘처럼 흘러나오던 흐름을 잊고 방황하다 이상하게 마무리된다.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고 생각나는 대로 잡다한 것을 쏟아내고 읽어보거나 수정하는 일 없이 그대로 닫는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그 순간 무슨 생각을 옮겼는지 궁금하면 가만히 열어서 읽어보게 된다.
차분한 상태에서 자신의 내면을 관하는 것이 가능하였던 때엔 굳이 이런 작업이 필요 없었는데 감정을 다시 타게 되면서부터는 나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뇌파를 일률적인 선상에서 유지하려고 노력해본 적이 있다. 감정이나 이성이나 어떤 측면에서도 늘 흔들림 없이 잔잔하고 매사를 정확하게 간파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온갖 느낌과 만사에 다양한 채널을 동시에 열어도 수용이 가능하였던 그 시기에 나는 가만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즐겼었다.
다시 그런 모습을 찾아야만 이 혼란의 시간을 순조롭게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는 대로 받아들이고 물결치는 대로 같이 굽이굽이 그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이 풍랑에 좌초하지 않는 비결일 수 있겠다.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저녁나절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던 내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가끔 그 선선한 바람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늘 반듯할 순 없겠지만 흐트러졌던 모습들을 추스를 정신은 차릴 수 있겠다.
주말을 지나 내게 몰아칠 태풍을 빨리 맞고 그 태풍의 눈을 벗어나고 싶다.
한동안 다양한 장르를 고루 들어보려고 정리해놓은 음악 파일 일부를 선곡해서 기분에 따라 들을 수 있도록 해놓고 그것을 거의 반복적으로 들어왔다. 자주 들어가던 세이캐스트 음악 방의 반복적 선곡에 싫증을 느낀 후론 늘 내가 듣고 싶은 충동이 이는 곡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서 듣는다.
며칠 들끓어 오르는 감정을 조율할 음악을 찾지 못하다 언젠가 폭발하듯 강렬할 도입부를 가진 음악을 찾다 사다 놓은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를 꺼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처럼 합창이 들어간 부분이 있는 곡이다. 레퀴엠을 듣다 감정이 수그러들었다 다시 격앙된 순간 불같이 끓어오르는 욕구를 채워줄 만한 곡으로 달리 손에 잡히는 곡이 없어서였다.
볼륨을 제법 높여놓고 창을 닫았다. 제1 서곡은 가슴을 쿵쿵 치는 듯한 북소리와 함께 반복되는 가사, 박자가 빨라지면서 합창 부분이 강해지는 탓에 볼륨을 높이면 짧은 순간 강렬한 도취가 가능하므로 귀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 볼륨을 높이게 된다.
음반이나 그림이나 내게 전문적인 지식은 전무하다. 그저 느낌대로 끌리는 대로 좋으면 듣고 좋으면 보는 정도. 최근에 자주 듣던 테마로는 이 갑갑한 마음 충동적인 기분들을 차분하게 조율할 수 없어 다시 찾게 되는 것이 클래식이다.
두 번을 반복해서 듣는 동안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격한 감정에 눈물을 흘리고 나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것처럼 음악이 주는 카타르시스도 대단한 것이다.
며칠째 여전히 잠이 부족하다. 그런데도 낮잠을 자는 일은 드물다. 아이에 대한 생각을 떨구고 혼자일 수 있는 시간 동안 뭔가 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아이가 자는 동안 생각의 흐름을 쫓느라 밤을 새우거나 하는 경우가 잦다.
낮엔 밤에 느낄 수 있는 부분만큼 섬세한 감정의 흐름을 탈 수가 없기 때문에 글을 쓰더라도 맘 같지가 않다. 현실적인 생각에 이끌리면 글은 샘처럼 흘러나오던 흐름을 잊고 방황하다 이상하게 마무리된다.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고 생각나는 대로 잡다한 것을 쏟아내고 읽어보거나 수정하는 일 없이 그대로 닫는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 그 순간 무슨 생각을 옮겼는지 궁금하면 가만히 열어서 읽어보게 된다.
차분한 상태에서 자신의 내면을 관하는 것이 가능하였던 때엔 굳이 이런 작업이 필요 없었는데 감정을 다시 타게 되면서부터는 나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뇌파를 일률적인 선상에서 유지하려고 노력해본 적이 있다. 감정이나 이성이나 어떤 측면에서도 늘 흔들림 없이 잔잔하고 매사를 정확하게 간파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온갖 느낌과 만사에 다양한 채널을 동시에 열어도 수용이 가능하였던 그 시기에 나는 가만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을 즐겼었다.
다시 그런 모습을 찾아야만 이 혼란의 시간을 순조롭게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는 대로 받아들이고 물결치는 대로 같이 굽이굽이 그 흐름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이 풍랑에 좌초하지 않는 비결일 수 있겠다.
더위가 한풀 꺾이면서 저녁나절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던 내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가끔 그 선선한 바람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늘 반듯할 순 없겠지만 흐트러졌던 모습들을 추스를 정신은 차릴 수 있겠다.
주말을 지나 내게 몰아칠 태풍을 빨리 맞고 그 태풍의 눈을 벗어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