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섬 <2003~2009>/<2005>
프란체스카 코스프레 참여후기
자 작 나 무
2005. 5. 3. 11:17
* 이 후기로 imbc에서 1등 당첨되어 디카를 경품으로 받았다. 지금보니 정말 두번은 하기 힘든 짓(?)을 했다. 그때가 아니었으면 언제...??
무려 10시간을 길에서 오가는 시간으로 보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선 만나기 힘든 사람들을 만나고 왔다는 것이 짧은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일요일 아침에 깼을 때도 서울에 갈 생각은 없었다. 아니 내 몸이 피곤한 것을 견뎌줄지 자신이 없어서 못 간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만 지나면 내가 다시 이런 허튼 모험(?)을 겁 없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빠듯한 시간을 두고 몸을 달궜다.
머리만 감고 아무 준비도 없이 나왔다. 우선 늦지 않게 서울에 도착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다른 건 나중 문제다. 다행히 행사장에 이동할 시간까지 겨우 확보될 수 있는 시각에 서울에 도착할 수 있는 차편이 있었다. 지영이는 어린이집에 월요일 결석하기 싫으니 갔다가 바로 돌아오는 게 아니면 싫다고 서울은 가지 않겠다고 하길래 출발 전에도 그 때문에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일만 보고 심야 우등을 타고 내려올 계획으로 나선 걸음이었다.
한참 달리던 중에 차례로 문자를 넣었다. 초록별님, 꽃그늘님, 선재님... 초록별님은 일요일 아침에 집안일로 바쁘신 줄 알고 있었는데 그 피곤하고 바쁜 중에도 시간 맞춰 터미널로 마중을 나와주셨다. 말씀하신 끝내준다는 검정 벨벳으로 만든 롱드레스와 부탁한 빨간 립스틱이며 헤어젤, 검정 펜슬... 게다가 검은색 메니큐어까지 챙겨서 오셔서 나를 놀라게 하셨다.

변신
얼굴은 몰라도 그냥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만 봐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보자마자 이쁘다는 말에 지영이는 껌벅 넘어가서 차 안에서도 내내 싱글벙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나는 차 안에서 엉성하게 분장하느라고 바빴다. 서울 지리도 잘 모르신다면서 지하철 타고 가는 게 빠르다는 나를 그냥 보내기에 신경이 쓰이시는지 그렇게 길을 수없이 물어가며 영등포까지 태워주고 댁으로 돌아가셨다.
영등포 롯데시네마에 5시까지 모이라는 장소에 가보니 온통 검정 옷을 입은 참가자들이 대기실에 그득했다. 나는 코스프레란 것에 대해 특별히 아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뭘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막연히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해본다는 것이 전부였던지라 많은 준비를 하고 온 그들을 본 순간 웃음부터 나왔다.
젊디젊은 그들 속에 끼어 주책 아줌마가 되는 길 밖에는 없다는 생각에 몸이 쭈뼛쭈뼛해졌지만 이미 이렇게 먼 길을 나섰으니 그냥 제풀에 그만두면 정말 안 온 것만 못한 게 될 것 같아 옷을 갈아입고 대기실에 합류했다.

코스프레 행사에 참여하려면 내게 필요한 것이 너무 많아서 정작 참여하기까진 망설이게 하는 요소가 제법 많았다. 우선 옷을 구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며칠은 검은색 옷과 관련된 인터넷 사이트 검색을 하며 골몰하다 옷가게마다 마땅한 옷이 있는지 뒤지고 다니느라 몇 번은 외출했지만 프란체스카 분위기를 낼 만한 옷을 사려면 비용도 만만찮아 어디선가 빌려 입지 않고서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서울까지 오가는 경비가 최소한 10만 원은 들어야 할 것이고 헤어 매니큐어를 한지 두 달도 안된 머리에 다시 검정 물을 들였다가 원상 복귀하려면 그 비용도 엄청나고 머리카락도 피곤해할 것이라 일회적으로 검은색으로 보이게 하는 방법은 없는지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별 뾰족한 것이 없었다.
그 와중에 나오는 걸음이 워낙 바빴던지라 구두를 닦지 못하고 나와서 가방에 액체 구두약을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분장해도 갈색톤인 내 머리카락 색깔 때문에 영 분위기가 나지 않는 게 맘에 걸려서 화장실 거울을 보고 나는 그 검은색 액체 구두약을 머리카락에 쓱쓱 문질러 바르기 시작했다.

냄새가 장난이 아니었다. 도무지 그 냄새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몰라도 내가 한 짓을 내가 아는지라 혼자 웃음이 터져서 머리카락 앞부분을 조금 커버한 후에 더는 무리겠다 싶어 그만뒀다. 이미 바른 것은 어쩔 수 없고.... 구두약과 짧은 앞머리를 가운데 가르마로 갈라놓은 머리를 움직이지 않게 하려고 젤로 칠갑이 된 머리 때문인지 슬슬 두통이 나기 시작했다.
서울까지 5시간 남짓 버스를 타고 올 때도 하지 않던 멀미가 분장 후에야 나기 시작한 것이다. 안경을 벗으면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설정상 안경을 벗어야 했고 서울 가기 전날까지 우황청심환을 먹고 침 맞고 겨우 추스를 정도로 몸이 안 좋은 상태였기에 행사 참여를 위해 콘택트렌즈를 맞추거나 앞이 안 보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준비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눈앞에 뵈는 것 없는 프란체스카가 되고 말았다. 안경을 벗고 보니 낯선 많은 사람 앞에서 느끼는 공포감이 반감되는 것이 느껴졌다. 대기실에서 사진도 찍고 다과회장에서 MBC 카메라 앞에서 버벅거리고 말 한마디 못하고 얼어붙은 지영이를 대신해서 몇 마디 하는 동안에도 나는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몰라서 다소 얼어 있었다.

나는 특별히 준비한 게 없으니 제일 마지막 팀으로 순서가 잡혀있어서 기다리는 시간이 제법 길었다. 평소에 오래 신고 다니지 않던 구두를 신고 왔다 갔다 한 덕분에 허리가 팍팍해서 틈만 나면 앉고 싶었지만, 눈을 약간 내리깔고 멍 하고 도도한 표정이 주특기인 프란체스카처럼 하고 서 있느라 제법 애먹었다.

내 차례가 돌아왔다. 썰렁하기 짝이 없는 순간이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대에 올라가 한 바퀴 돌고는 그야말로 썰렁하고 어색하게 서 있었다. 하려고 했던 대사는 얼어서 나오지도 않았다.
"니들..맘껏 즐겨. 내 이름은 박.봉.곤 이라고 해. 너..너도 이름 하나 지어줄까? 두일이 어때? 두일이.."
대략 이런 대사를 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다 못해 마이크 소리가 작아서 내 목소린 사회자밖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집에서 할 때는 잘 되던데..... 특히 안성댁 흉내 내는 게 젤 재밌었는데 무게 잡느라 프란체스카 분장하고 와서 안성댁처럼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참았다.
특별손님으로 출연한 프란체스카 출연진 중에 정작 프란체스카 역할을 맡은 심혜진 씨와 안성댁을 만나지 못한 것이 그나마 조금 아쉬웠다. 시상식이 끝나고 단체 촬영 후 나는 그야말로 기진맥진해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래도 내 평생 두 번 해볼 수 없을 것 같은 특별한 경험의 첫 장을 연 날이었다. 두고두고 아이와 내 기억 속에 재밌고 특별한 하루로 기억될 것이다.

"엄마...프란체스카는 왜 저렇게 노래를 이상하게 불러?"
- 낸들 그걸 어케 알겠뉘~
"엄마, 엘리자베스가 젤 이뿌다 그치?"
- 아니야!!!! 프란체스카가 젤 이뻐~!!!(왕관 쓰고 나올껄 그랬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