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섬 <2003~2009>/<2004>

마음이 나드는 자리

자 작 나 무 2004. 11. 4. 10:52
"선생님은 왜 맨날 그 잔에만 커피를 마시세요?"
우리 집에 공부하러 오는 아이 하나가 그렇게 불쑥 물어왔다. 나는 언젠가부터 유리 머그잔에 커피를 마시는데 매번 그 잔만 찾아서 마시고 있다. 아이들 보기엔 썩 예쁜 잔도 아닌데 매번 그 잔에만 마시는 게 이상하게 보였나 보다. 
"응.. 나는 이 잔이 제일 좋아."
그 잔이 제일 좋은 이유는 제일 예쁜 잔이어서도 아니고 제일 큰 잔이어서도 아니다. 커피를 머그잔에 그득 부어 마시니 예쁜 커피잔은 있어도 거의 꺼내 쓰질 않는다.
 
손에 익은 이 머그잔은 커피를 부어 마시기 시작하면서 이젠 커피색이 배일 정도로 많은 커피가 담겼었고 내 손에 익어서 다른 예쁜 잔이 있어도 쉽게 거기에만 손이 간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자기에게 익숙해지고 정들면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물건이야 못쓰게 되고 버려야 할 상황이 되면 미련 없이 버려야겠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으니 사람을 사귀어 정들이는 것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다.
 
예쁘고 매끈한 잔이 아닌데도 내 손에 익고 내 눈에 익어 늘 끼고 사는 머그잔처럼 잘나고 똑똑한 친구가 아니라도 유난히 정이 가는 사람이 있다. 가끔이라도 일부러 찾아가서 얼굴이라도 보고 안부를 묻게 되는 친구는 몇 되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연락이 끊기지 않고 잘 지내오던 친구는 4년 전 세상을 떠났고 그나마 어릴 적부터 친구였고 아직도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는 단 한 명뿐이다. 친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러 연락하는 친구는 그 친구뿐이다. 
그 친구가 아주 잘나고 똑똑해서가 아니라 흐른 세월만큼 정이 들었고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속을 알아주고 그냥 마주하고 차만 한 잔 마시고 와도 늘 편안하다.
 
한번 정들이면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알뜰하게 생각하고 안부라도 더러 물을 수 있는 좋은 사이로 남고 싶은 내 욕심에 누구라도 쉽게 인연 맺고 싶지가 않다.
한때 PC통신을 하면서 알게 되었던 많은 사람 중에 좋은 분들도 많았고 단번에 쉽게 마음을 터놓고 정들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내가 통신을 떠남과 동시에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잠시 정이 깊었다 한들 끝은 참으로 허망하였던 내 경험으로 지금도 더러 블로그를 오가며 친분을 가지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가끔은 생각 끝에 깊은 정은 들이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품게 된다. 
내가 인터넷에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미묘한 아쉬움과 서운함이 한때 남겠지만 너무나 당연한 일처럼 유령 같은 인연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일부러 어제 그 친구가 일하는 김밥집에 찾아갔었다. 애타게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보고 오면 마음이 편안하고 기분도 좋아진다. 눈에 보이는 친구와 볼 수 없지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아마도 나는 눈에 보이고 만날 수 있는 친구 쪽을 택하게 될 것이다.
 10여 년 넘게 통신을 했으면서도 결국 사이버에서 오래 이어진 인연 하나 없었던 것은 모두 한때 스쳐 가는 인연이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마음가짐은 그렇지 않았더라도 가벼운 인연으로 생각하고 내 마음이 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많은 것들처럼 가늠할 수 없는 생각과 마음들이 분분히 오가는 이 공간에서 나는 다시 내 마음이 흐르는 길을 윤이 나게 닦아본다. 넘쳐흐르지 않는다면, 많이 아프지만 않다면 보이지 않는 사랑에 꿈결처럼 가끔은 가슴을 앓아도 좋다고 나의 망상을 허락해본다.
 
<PC 통신할 때 파란 바탕에 한 줄씩 뜨곤 하던 하얀 글씨가 아직도 반가운 마음이 왈칵 들 만큼 정겹다. 그 당시 내가 사람들과 주고받은 대화 중에 흐르던 마음 한 가닥도 거짓이 아니었음에.... 아직도 그때 생각을 하면 가슴이 울컥거린다.>
 
<몸이 아프면 꼭 예전에 좋았던 때가 그리워지고 옛날 생각이 나곤 한다. 낮에 지영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혼자 방 안에 있는 동안은 내 나이도 내가 해야 할 일도 다 잊고 컴 앞에 앉아서 놀곤 한다. 며칠 전부터 독감 예방 접종해야겠다는 말을 몇 번 했었는데 오늘쯤 병원에 가려고 했더니 이미 감기가 심하게 걸렸다. 며칠은 이 지독한 감기와의 전쟁을 또 치러야 할 것 같다. 목과 코가 또 말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