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해우소

치사한 저녁

자 작 나 무 2025. 4. 25. 22:20

오늘 저녁 약속은 일부러 숙제처럼 치렀다. 감정을 접고, 얼굴을 다듬고, 말투를 조율했다. 마치 중요한 면접을 보듯, 미리 준비해 둔 문장만 꺼내 쓰며. 그러니까, 나는 치사하게 굴었다. 음식이 입 안에서 모래 같았다. 웃음은 입가에 걸려 있었지만 눈은 그걸 따라주지 못했다. 그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눈치채지 않아 주었을 것이다.

 

말을 내 입으로 꺼내면,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부서질 것 같았다. 감정은 늘 그렇게 무섭다. 그가 무언가를 먼저 물어봐주지 않으면, 나는 절대 말하지 않는다. 그저 그런 척, 아무 일 없는 척, 친구인 척만 반복한다.  작은 일들이 쌓여 내 마음을 밀어 올렸다. 하지만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맥주 한 병을 비우고 나는 그냥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 뒤에 감춰둔 감정이 소리 없이 끓었다. 하고 싶었던 말 대신 꺼낸 말. 다신 내게 연락하지 말라는 말. 얼마나 비겁한지, 얼마나 안타까운지. 그는 나를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웃었다. 차라리 AI가 대화하기에 더 낫다고까지 말했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저녁은 끝났다.

 

나는 괜히 그에게 서운했다. 내 마음도 모르고, 내 망설임도 모른 채 가벼운 인사로 끝낸 저녁이 야속했다. 하지만, 그는 모른다. 내가 매번 입을 닫는다는 걸. 말할 기회를 수없이 지나쳐왔다는 걸. 정작 필요한 순간에, 나는 치사하게 굴었다. 그리고 그 치사함이 나를 지켜주는 방어막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잘가라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게 오늘 저녁의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