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속은 얄팍하다
2025-04-29
누가 더 독하고 못된 건지 내기라도 하려고 한 건 아녔다. 내가 더 내려놓고, 더 지는 자리에 서면 그나마 겨우 붙들고 지탱하던 내 딸과 단둘이 사는 그 삶조차 더 휘청일까 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부족한 능력에 터무니없는 경제력까지 더해져서, 내가 나서서 그 모든 일을 평정하고 지휘하기엔 엄마 역할을 해야 하는 내 입장이 더 컸다고 변명하는 수밖에 없다.
동생네가 다 알았다고 하니 이제 부끄럽고 미안할 것 없이 밀린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그들도 자식 키우며 사는 부모가 되었으니 자식의 입장과 부모의 입장을 적절히 생각할 수 있겠지. 어제 19년 전에 얼굴 한 번 보고 처음 통화한 올케가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며 엉엉 울었다.
가슴에서 나오는 그 울음이 내게 작은 위로가 됐다. 그간 조용히 누구에게도 해 끼치지 않고 살겠다고 큰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아니 숨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견딘 세월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그분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화 속에서 느꼈다. 나도 참 어지간한 사람이구나. 평범한 사람은 할 수 없는 삶을 살긴 했다. 그걸 누군가 알아주고 다독여준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처음 만나서 밥 먹는 그 자리에서 알아보긴 했다. 남동생이 참 선하고 좋은 사람을 데려왔구나.....
그래서 안심하고 어떤 말도 한마디 건네지 않고 나는 내 자리만 지키고 살았다. 우리가 얼마나 좋은 관계를 맺고 이어가며 앞으로 살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이제 내 딸이 어디든 손 내밀고 기댈 곳이 있을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고맙기 그지없다. 참 감사하다. 잘 살아줘서.
오후에 그 집에 갔다가 나오면서 감정이 잘 추슬러지지 않아서 약을 좀 먹었더니 이제 머릿속이 편안해졌다. 돌이킬 수 없는 세월이 흘렀고, 우리가 앞으로 살아낼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명절 되면 갈 데 없고 오라는 데 없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는 면하게 됐다. 예쁘게 잘 키운 딸 데리고 명절엔 가족들 모이는 자리에 갈 수 있겠다. 이제야.... 20여 년이 훌쩍 지난 이제야. 섬으로 떠돌다 지쳐서 고향을 떠난 이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