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10
어제 퇴근길에 남쪽엔 폭우가 쏟아졌다. 옆자리 동료가 이런 빗길을 뚫고 집에 가는 건 무리한 일이라고 말리셨다. 이유는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지만 회귀 본능이라도 이미 입력된 것 같았다. 금요일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미 내 몸 어딘가에 코드를 심어놓은 것처럼 움직인다.
반쯤 달리다 보니 조금 윗동네는 비가 잦아들어서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했던 구간을 겨우 넘어왔다. 지치고 배고픈 상태로 나흘 만에 집에 돌아왔다. 딸이 스팸을 굽고 김치 볶아서 달걀 넣고 만든 스팸 김치 김밥을 만들어줘서 허겁지겁 고픈 배를 채웠다. 달리 식자재를 사놓지 않고 반찬도 만들어놓지 않고 가버려서 저 나름 뭐든 먹을 것을 만들어 먹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제 밤늦게 라면을 혼자 끓여 먹는 것으로 보아 음식을 장만해서 먹는 것은 일주일에 몇 번 되지 않고, 라면을 자주 먹는 게 아닌가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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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까지 연휴였으니 이번 주는 집에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쉬고 한 주 보낼 수도 있었다. 마침 폭우를 핑계로. 그런데 뭔지 모르게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처럼 피곤하고 먼 길을 아무 생각 없이 달렸다. 한참 달리다 보니 생각났다. 내 생일이 다음 주중이어서 지나고 생일밥 먹기는 좀 아쉬우니까 주말에 생일 치레로 딸과 같이 밥 먹기로 한 약속이 있었다.
챙기지 않고 지나가면 나에겐 챙길 기념일이 하나도 없으니 생일이라도 꼭 챙기기로 했다. 한동안 먹지 못한 과일이 아쉬워서 어제 밤늦게 동네 마트에 가서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담아서 들고 왔다. 화장품 코너에서 스킨, 로션을 담았다가 한 바퀴 돌고 뺐다가 다른 제품을 담았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아직도 나를 위해 이런 것 하나도 선뜻 사지 못하는구나.....
열심히 산 나를 위해 직접 생일 선물을 산다. 가끔 딸이 동행하면 내게 어울리는 옷이나 장신구를 딸이 골라주고 내 카드로 계산한다. 늘 쓰는 기본 화장품은 싸고 양 많고 질도 괜찮은 것으로 골라서 딸과 나눠 쓴다. 언젠가 딸이 내가 쓰는 로션 냄새가 왜 그렇게 이상하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 마트에 파는 화장품 중에 제일 싼 것으로 골라서 그렇다고 말했더니 딸 마음이 불편한지 다음엔 그 제품을 사지 말라고 했다. 별생각 없이 쓰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한방 무슨 성분이 든 것처럼 광고하는 제품이어서 약간 한약 냄새 같은 게 났다. 나도 그런 향이 나는 화장품을 좋아하진 않는데 한 번 써보니 괜찮은 것 같아서 계속 반복해서 장바구니에 넣었던 모양이다.
익숙한 것 하나를 놓으면 다음엔 어떤 제품을 골라야 할지 몰라서 막막해진다. 색조 화장품은 20대부터 우연히 해외브랜드를 쓰기 시작해서 아직도 다른 브랜드로 바꾸지 못하고 그걸 쓴다. 익숙해지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습성이 있는 모양이다. 더 좋은 것을 찾지 않고 괜찮으면 정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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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아직 일어나지 않아서 멍하니 거실에 앉아 희부연 창밖을 흘낏 보며 노트북을 두드린다. 앉기 전에 떠올랐던 생각 하나를 결국 꺼내지 못하고 다른 이야기만 뱉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