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작 나 무 2025. 6. 12. 20:37

2025-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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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출근하자마자 먼 길을 달렸다. 시외 행사, 왕복 세 시간 운전. 행사장에서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있었다. 그 일만으로도 몸이 무거워졌다. 뻔한 하루가 될까 봐, 조수석에 앉은 학생과 나는 친구처럼 이야기했다. 몇 번 야간 자습 출석 부르며 스쳐본 적 있는 얼굴. 오늘 우리는 처음으로 긴 이야기를 나눴다.

 

행사장에 배정된 자리가 하필이면 에어컨 앞. 짧은 교복을 입고 온 아이는 식이 시작되기도 전에 팔을 문질렀다. 나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바람의 방향을 위로 돌려달라 말했다. 에어컨은 방향을 틀었지만, 아이의 어깨는 계속해서 오그라들었다. 얇은 반팔 원피스 위에 걸쳤던 내 카디건을 벗어, 그의 팔 위에 덮어주었다.

 

꽃무늬가 수놓인 얇고 작은 여자 카디건. 나보다 훨씬 큰 남학생이 그것을 입고 앉았다. 어깨를 움츠리고 앉은 그 모습이 너무도 우스꽝스러워, 나는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곧, 그 장면의 이유가 떠올라 마음이 조용히 아팠다. 얼마나 추웠을까. 얼마나 곤혹스러웠을까. 아이는 체면 같은 건 뒤로 미루고 그 낯선 옷을 품었다.

 

모임의 절반은 사회인이어서 내가 중간에 뭔가를 하는 건 번거롭고, 눈에 띄는 일이 될까 봐 옷을 벗어주는 것 외엔 더 하지 못했다. 추위에 질린 아이는 점점 말이 줄었고, 표정이 사그라들었다. 팔을 한번 문질러주고 싶었지만, 여학생이 아니었다. 손을 뻗지 못한 내 머뭇거림이 오늘 가장 오래 남는 감정이 되었다.

 

핸드백 속에 들어 있던 레몬 사탕을 꺼냈다. 아침을 굶고 온 아이가, 장황하고 갈피 없는 연사의 말들을 끝까지 버티기엔 벅찰 것 같았다. 사탕 껍데기를 살짝 비틀어 까서 손바닥 위에 사탕을 올려 슬쩍 내밀자 아이는 말없이 받아 입에 넣었다. 오물오물 혀끝에 퍼지는 새콤한 맛에 잠시 정신이 팔린 듯했다. 어쩌면 그 짧은 순간만큼은 추위도 배고픔도 잊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짧은 시간 안에 가까워졌다. 점심으로 준비된 음식들을 몇 접시씩 담아 허기진 배를 달랬고, 웃으며 기념사진도 남겼다. 돌아오는 길엔 잠시 방향을 틀어 나무 그늘이 드리운 공원을 천천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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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 어머니가 하노이 근처 시골 마을 출신이라 했다. 잠깐 눈빛이 마주친 틈에 오래 전 갔던 베트남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작년에 찍어둔 사진을 꺼내 보여주며, 나도 한 번 그 땅을 밟아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불씨가 되어 이야기는 불현듯 번져갔다. 여행의 볕 냄새, 골목의 먼지, 노점의 연기까지 따라 나왔다. 이곳에 와서 직장에서 그렇게까지 가까웠던 대화는 처음이었다.

그 아이는 내 말을 끝까지 잘 들어주었고, 자신의 말도 단단히 채워 건넸다. 오늘의 출장은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알고 지낸 사람과도 나누지 못한 느슨한 평화의 시간이었다. 수다는 쉼 없이 흘렀고, 점심은 따뜻했으며, 나무 그림자 아래의 공원 산책은 오래된 우정처럼 조용히 안겼다.

 

우리는 과학 이야기를 꺼냈고, 그 안에서 뜻밖의 우주를 보았다. 나 혼자만 품고 종종 생각 속에 굴리던 생명과학 이야기들이 그 아이 입에서도 나왔다. 뜻밖에 진지한 말들이 오갔고, 마음 한쪽이 조용히 환해졌다. 그런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