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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5>/<2025>

볕이 가라앉는 시각

by 자 작 나 무 2025. 6. 17.

2025-06-17

해야만 하는 일에 치어서 하루를 보내고 볕이 다 가라앉기 전에 잠시 걸으러 나섰다. 밤늦은 때까지 시험 문제 내느라 깨어 있을 체력이 안 되는데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어쩐지 이런 때엔 미뤄야 할 것이 그렇게 하고 싶고 달달하다.

종종 생각나서 사 먹으러 가면 오늘은 쉬는 날이라는 팻말을 걸어두는 도넛 가게에 무심코 갔다가 문이 열렸기에 도넛 몇 개를 샀다. 설탕 묻힌 따끈한 도넛이 든 노란 종이 봉지를 한 손에 쥐고 크록스에 반바지 차림으로 잠시 걸었다. 수국이 아직 덜 핀 동네에서 유명한 수국길 어딘가에서 도넛을 먹을 생각이었다.

 

어느 순간 이상하게 마음 끝이 시큰해져서 멍울멍울 가슴 근육 어딘가에 통증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착각, 퇴근하고 곧장 통화하던 딸이 쉴 새 없이 말할 때 내 몸이 너무 지쳐서 좀 쉬어야겠다고 전화를 먼저 끊었다. 이후에 잠시 정신 차리고 뭔가 먹고 다시 먹을 걸 사러 밖에 나가서는 손에 빵봉지를 들고 차 문을 닫는데 문득 그 느낌이 들었다.

 

딸과 연결된 신경 세포가 온전히 곤두서서 그 아이의 감정에서 흘러나오는 끈적한 느낌을 읽어내기라도 하듯이 내 감정도 아닌 것 같은 감정이 어느 순간 느껴진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종종 그럴 때가 있다. 

묘하게 허전하고 이상하게 코끝 시큰하고 뭉클해지는 감정, 내가 아무리 잘해줘도 딸이 이런 감정을 느끼겠구나 싶은 착각을 실시간으로 느꼈다. 나도 모르게 그 순간 느껴진 감정을 안고 몇 해 전에 친구네 딸과 둘이 잠시 이곳에 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수국길을 찾아갔다.

 

내가 다 채워줄 수 없겠다. 젖먹이 때 나에게 온전히 의지하던 그때 외엔 그럴 수 있을 것으로 믿은 적도 없었다. 그래도 며칠 내내 퇴근하자마자 전화해서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는 딸에게 내가 잠시 의지가 되었으면 싶었다. 그런데 나도 이곳에선 일상에 지쳐서 퇴근할 무렵이면 겨우 몸만 살아서 이곳으로 돌아온다. 에너지를 충전하기 전엔 대화하기 어렵다.

 

이 길에서 잠시 충전이 되었지만, 원룸에 돌아와선 창문을 열어놓고 가무룩하게 잠들어버렸다. 자다 깨서 열린 창을 닫고, 세수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서 한참 생각을 더듬었다. 세수하고 발이나 씻고 다시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보니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빵 사러 다시 나갔다 왔던 거였다.

 

시험 문제 내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눈이 그대로 내려앉을 것 같아서 일기나 끄적거리고 자야겠다. 좀 전에 본 그 문제를 이리저리 변형하면 되겠다고 생각해서 머리가 잘 돌아갈 줄 알고 앉았는데, 만만찮은 내일 일과를 버티려면 쉬어야지. 

 

*

오늘은 이만 잠들고, 내일 깨서 또 일해야지. 내가 여전히 유일한 경제 주체니까 최대한 버텨야지. 이게 현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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