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선 그랬다. 그냥 노닥거리듯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도 나는 여행 중이라는 그럴싸한 표지판이 있어 불안하지 않았다. 꼭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여행지가 아닌 이곳에서의 시간만이 유독 불안해야 할 이유는 없을 텐데 이곳에 돌아와 한숨 돌리자마자 현실이라는 것이 발라먹기 번거로운 가시 많은 생선처럼 밥상에 올라앉았다.
나를 태운 배가 보길도 청별항을 빠져나오며 뱃머리를 땅끝 방향으로 돌리는 순간 첫선을 보고 기약없이 이별하는 연인을 두고 오는 기분이 들어 미묘한 감상에 젖어들었다. 첫눈에 반하진 않았어도 눈만 감으면 삼삼하게 떠오르는 수수하면서도 기품 있는 자태가 떠올라 하냥 그리워져도 이미 닻을 올렸으니 돌아갈 수도 없고 그제야 마음 빼앗긴 것을 알았다.
비록 속살을 드러내보이지 않았어도 그녀의 자태는 고혹적이었다. 마음을 반쯤 닫고 무심한 척했어도 무슨 마력이라도 지닌 듯 나를 한껏 빨아들였던 그 섬에서 미처 발길이 닿지 못했던 곳을 두고도 태연한 얼굴로 배를 타는 나를 그는 또 얼마나 덤덤한 낯으로 편안히 배웅해 주었던가.
보길도는 내겐 그런 섬이었다. 얼마나 많은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앓은 뒤에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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