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 토요일
모처럼 단풍놀이를 가기로 한 놀토 아침, 집을 나서기 전부터 딸이랑 사소한 일로 한바탕 언성을 높이고 마음이 일없이 무거웠다. 겨우 마음을 풀고 나선 걸음이 송광사를 향했다. 사찰에 참배를 하러 간다기보다는 나는 산에 가고 싶고, 딸은 맛있는 걸 먹으러 가고 싶은데 두 가지 다 함께 할 수 있는 곳 중 한 곳이 이 곳 송광사다.
단풍이 붉은 이 곳 주변 식당가에 딸이 좋아하는 한식을 잘하는 곳이 있다. 꼬막정식을 먹겠다고 갔는데 손님이 너무 많아 식재료가 떨어졌다며 산채비빔밥 밖에 되지 않는다한다. 산채비빔밥을 시켜주니 약간 아쉬워하는 듯하더니 이것도 정말 맛있다며 나 보다 빨리 먹었다. 밥을 먹여놓으니 기분이 좋은지 걷기 싫어 뒷걸음치던 다리를 억지로 끌고 따라와 줬다.
하지만 금세 앞서 가며 다람쥐를 찾는다고 두리번거린다. 그리곤 송광사 들어가는 길이 언제 봐도 멋있다며 한마디 곁들인다.
이번엔 송광사에 들어가지 않고 불일암 가는 길을 선택했다.
단풍이 어찌나 고운지 사진도 좀 찍고.....
별을 뿌려놓은 것 같은 작은 도랑이 동화 속 세상같이 곱다.
낙엽 주워서 다시 뿌리기 놀이를 하며 지영이는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사찰과 산을 찾는 사람이 많아 산길도 붐빌까 봐 걱정했는데 우리가 지나는 길에는 인적이 드물어서 조용히 흙을 밟을 수 있었다.
끊임없이 재잘거리던 아이를 앞세우고 한참을 걸어서 불일암에 도착했다. 예전엔 되도록이면 스님들께서 수행하는 산 깊은 암자엔 들르지 않고 지나곤 했다. 문이 열려 있길래 산속에서도 천방지축 떠드는 딸래미 입 단속을 시키고 저 문을 들어섰다.
싸리가 키높이 자란 좁다란 길을 지나니 치자가 열려있던 작은 마당과 발이 드리워진 작은 전각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언젠가 조용히 혼자라도 산 속에 작은 집 한 칸 마련해서 감자밭이나 일구며 살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딸을 낳기 전에는 더러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법정스님께서 옛날에 쓰시던 세숫대야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몇 점의 사진이 걸려있는 이 곳이 바라보이는 곳에 나무 의자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조용히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또 너무 감상적으로 빠졌는지 눈물이 핑 돈다. 마침 지영이가 옆에서 까불고 떠드는 바람에 혼자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고요도 한순간 날아가버렸다.
20여 년 전에 손수 지으셨다는 여름 욕실에도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혹시나 뒷간으로 착각하고 엉뚱한 볼 일을 보시는 분들이 있을까 염려하여 적어놓은 것 같았다.
마침 분위기가 그러하니 이 고즈넉한 풍경을 앞에 두고 갈수록 잔가지 많아지는 나무처럼 잔 욕심 늘어가는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방명록을 쓰고 가는 분도 있고, 앉아 친구와 가만히 한담을 나누는 객도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조용히 산길을 걷다 들른 곳이지만, 지표 없이 표류하는 내 삶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내 방 안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내 삶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내 삶을 차분하고 낮게 되돌아볼 수 있게 한 작은 계기와 인연의 끈이 되어주신 이름을 떠올려본다. 어떤 이의 삶의 일면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긍정적인 영향이 이렇게 다채롭다는 사실이 그분을 존경스럽게 생각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된다. 먹물 옷 입고 겉과는 다른 호화로운 삶과 물질적인 부를 누리며 떠받들어지는 것이 무슨 계급이라도 단 것 마냥 으스대는 권승들의 모습에 질려 어지간해선 진심으로 고개 숙이는 일이 없어진 내게, 진심으로 묵례를 올리게 한 스님의 자취를 잠시 바라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재삼 확인한다.
너무 욕심부리지 말자.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만이라도 고마운 마음으로 누릴 줄 알던 내 모습이 갈수록 변질되어가고 있다. 처음 마음먹었던 대로 살아보는 거다. 자신을 잃지 않으려면 건강이 제일이다. 병에 걸려 충분히 치료받지 못하고 앓다가 돌아가셨다는 후문을 듣고 보니 그것 하나만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다른 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니 굳이 입 밖으로 낼 필요도 없는 일이다.
바스락거리며 낙엽 밟히는 소리를 뒤로 하며 내려오던 그 길은, 한껏 곱게 물든 가을의 정취와 아름다운 여운이 함께 물들어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외롭고, 슬프고, 아프고, 기쁘고, 행복한 이 모든 기분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삶의 다채로운 빛깔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나는 또 어느 날 다른 길을 걸으며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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