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1일 여수 향일암
모친과 함께 저 길을 올랐던 것이 꼭 13년 전이다. 너무 오랜만에 갔더니 강산이 몇 번은 변한 듯 했다. 화려한 일주문도 없었고 금박 입힌 휘황찬란한 전각도 없었는데 너무 많이 변했다.
그사이 나도 이 만큼 변했으니 뭐라고 할 것도 못 된다. 엄마 손 잡고 왔던 딸이, 딸을 낳아 데리고 왔으니 세월이 가는 것이 모두 괘씸한 것만은 아닐 테다. 일주문에 들어서기 전에 가파른 계단 길과 완만한 길 두 갈래로 나뉘어 있어 들어갈 때는 일주문을 세워둔 계단 길로 갔다.
체구가 많이 크거나 뚱뚱한 사람은 통과하기 힘든 입구다.
"옛날에 원효 스님께서 너무 많이 먹고 게을러서 뚱뚱해진 사람은 못 오게 하려고 이런 곳에다 절을 지었단다."
지영이는 내가 지어낸 말을 진짜인 줄 알고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을 통과해서 계단을 좀 더 올라가야 향일암이 보인다.
지영이는 저 거북을 타고 바다 위를 날아다니고 싶은 모양이다. 나도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 주인공이 되어 저 옥빛 바다로 거북 등을 타고 뛰어들고 싶었다.
동백이 한창 피고 지고 또 피었는데 여수에 와서야 동백이 한창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집 안에서 꼼짝을 않고 지낸 탓에 여수와 자연환경이 비슷한 이 동네에 살면서 가로수로 섬 일대에 심어둔 동백에 꽃 핀 것을 여태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고 살았다. 올겨울은 좀 그랬다. 어깨가 처지고 우울하고 갑자기 이유도 없이 답답해져서 오히려 더 숨고 싶은 날이 많았다.
그런 기운을 한 번에 몰아내기엔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만큼 내게 좋은 약은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다지 멀지도 않으면서 늘 멀게만 느껴졌던 여수까지 갔었다. 원효 스님께서 참선했다고 적어놓은 널따란 바위가 눈에 띄었다. 저 바위에 앉아 조용히 혼자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절로 시원해질 것 같다.
금박 입힌 대웅전에 거부감이 생겨서 나는 들어가지도 않았고 지영이는 위쪽에 자리 잡고 있던 관음전에 가서 혼자 절을 하고 왔다. 뭐라고 기도했냐고 물었더니 엄마 아프지 않고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 빌었단다. 내가 얼마나 자주 아픈 척하고 사는 무능한 엄마인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울컥해졌다.
몇 달 일 없이 놀다 보니 조바심도 나고 속도 타서 아이에게 현실에 맞게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이것저것 아껴쓰라는 주문을 자주 했고, 무엇 무엇은 사주거나 해줄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원하는 것을 자식에게 다 해주는 것만이 좋은 부모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아이에게 꼭 필요한 것을 제때 못 해주게될까 봐 올겨울엔 유난히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하고 싶거나 가고 싶은 것이 생기면 오히려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뭐든지 해야겠다는 의지가 강해졌다.
거침없이 그어져 있는 듯한 저 푸른 수평선이 마음에 든다. 내 가슴 속에 가로막힌 장벽도 일제히 거두어내어 저렇게 시원한 느낌으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나올 때는 완만한 길로 돌아서 나왔다. 13년 전에 모친과 함께 와서 동동주 한 사발에 갓김치를 안주로 먹었던 그 집을 찾아내어 갓김치 한 통을 사고 동동주는 서비스로 얻어 마셨다. 오래 묵은 감정이 허기진 뱃속으로 들어간 동동주에 얼큰하게 취해서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그곳은 다시 한번 가보고 싶었으면서도 예전의 좋은 기억들과 현실과의 괴리감을 견뎌내지 못하고 눈물짓게 될까 봐 여태 발길을 돌려놓을 수 없었던 곳이었다. 돌아 나오던 길에 산 정상으로 나 있던 등산코스를 보고는 아이가 끝까지 가보자고 졸랐다. 돌아갈 시간이 빠듯하니 다음에 꼭 다시 오자는 약속을 하고 그대로 돌아 나왔다.
마른 나뭇가지에 새잎이 난 다음에 김밥 도시락 싸서 다시 가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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