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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일기4

감꽃 지는 밤 1990년대 중반 봄날에 쓴 일기  그가 피를 말리며 시를 쓰는 동안, 나는 그를 그리워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절망이 깊어져 소식마저 끊긴 이후, 내 머릿속에 스치는 모든 단어는 늘 그리움으로 시작되는, 젖어 있는 언어들뿐이었다.  촉촉함이 아니라,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 갇힌 듯, 축축하고 눅눅하게 스며든 그리움. 나는 스스로를 그 그늘 속에 가두어두고, 눈을 감고, 귀를 닫아버린 채, 마음까지 굳어져 버렸다. 이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도 모르는, 마치 한쪽 다리를 잃고 비틀거리는 절름발이가 된 것만 같았다. 감꽃이 조용히 지고 있었다. 작년엔 내가 알기도 전에 모두 떨어지고, 어느새 밤톨만한 감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 뜰에 나가보니 하얀 감꽃이 소리 없이 피.. 2024. 9. 8.
지하철에서 만난 개 한 마리 * 1995~1996년 사이. 어느 날 쓴 일기. 역시 나는 별 것 아닌 말을 참 길게 쓴다. 편지를 건네주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벌을 받은 듯하다. 그의 냉정한 목소리, 마치 모든 감정을 덜어낸 듯 차갑고 간결했다. 심플함이란 이런 것일까. 그를 만나기 위해 아홉 시간을 차 안에서 보내야 했다. 그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몸은 피로에 눌려, 부서질 듯 무거웠다. 결국, 짧은 통화와 가식적인 몇 마디 안부로 그 긴 여정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생길 수 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나는 언제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걸까? 내 의지로 삶을 살기 시작한 건 고작 몇 년이 채 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모른.. 2024. 9. 8.
'첫사랑' 마지막 회를 보고 나서 * 옛날 일기 출력본을 찾아서 온라인에 한 편 옮겨 쓴다. 요즘 나이로 스물일곱 살에 써서 나우누리 자유게시판 같은 곳에 올렸던 글이다. 지금 옛날 일기를 읽어보니, 나는 간결한 글을 잘 못 쓴다. 오글거리고 웃기지만, 심사받으려고 쓴 건 아니니까 기록 보관용으로 옮겨놓고 가끔 읽어볼까 한다.  1997년 4월 사랑은 온유하고 오래 참는 것이란다. 드라마의 마지막을 장식한 목소리에 담겼던 그 말은 익히 들어왔던 말이지만, 오늘은 그 말의 의미가 새록새록 깊이 가슴으로 스며드는 날이었다. 사랑이란 것이 시작되어 영글어가고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어물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사랑을 보았다. 그 미묘한 감정의 늪은 끝을 알 수가 없어 모르는 결에 빠져들어 가게 되고 빠진 것을 안 순간에는 이미 다시 나오기엔 벅찬 .. 2024. 9. 8.
동기와 결과 1994년 봄마당에 나와서 새로 돋은 잎을 보느라고 서성이다가 재롱을 부리는 우리 집 견공들의 등쌀에 못 이겨 한 번씩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털이 많이 자라 겨우내 털 한 번 잘라준 적이 없는 푸들이 어느새 깔끔하게 지붕 개량을 한 것이다. 게다가 왼쪽 목덜미에 핏자국이 보였다. 놀라서 살펴보니 제법 상처가 깊어서 이걸 어찌해 주어야 하나 하는 마음에 순간 꿈쩍 놀랐다. 새로 들어온 수컷이 물어서 그런 것인가 해서 아이처럼 어머니께 쪼르르 달려가서 “엄마, 삐삐가 피를 흘려요. 목에 상처가 큰 게 생겼어요.” 하며 울먹이듯 일렀다. 그게 화근이 되어 지금 어머니와 아버지는 한바탕 언쟁이 벌어졌다. 알고 보니 털을 깎던 가위에 살이 배인 것이었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약을 내와서 발라주면서 울먹거리는 나.. 2024. 1.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