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꽃 지는 밤
1990년대 중반 봄날에 쓴 일기 그가 피를 말리며 시를 쓰는 동안, 나는 그를 그리워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절망이 깊어져 소식마저 끊긴 이후, 내 머릿속에 스치는 모든 단어는 늘 그리움으로 시작되는, 젖어 있는 언어들뿐이었다. 촉촉함이 아니라, 마치 어두운 동굴 속에 갇힌 듯, 축축하고 눅눅하게 스며든 그리움. 나는 스스로를 그 그늘 속에 가두어두고, 눈을 감고, 귀를 닫아버린 채, 마음까지 굳어져 버렸다. 이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열어야 할지도 모르는, 마치 한쪽 다리를 잃고 비틀거리는 절름발이가 된 것만 같았다. 감꽃이 조용히 지고 있었다. 작년엔 내가 알기도 전에 모두 떨어지고, 어느새 밤톨만한 감이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 뜰에 나가보니 하얀 감꽃이 소리 없이 피..
2024. 9.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