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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길 위에서<2020>

가야산 자락 바람 부는 언덕에 앉아......

by 자 작 나 무 2020. 7. 28.

 

7월 21일

작년 여름에 해인사에 다녀온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그사이 한 해가 지났다. 전날 국숫집 가자고 찾아오신 왕언니께서 마침 시간을 내주셔서 동행했다. 작년 여름에도 그 분과 그 분의 지인이신 70대 왕언니도 모시고 함께 다녀왔다.

 

나는 따라다니기만 했으니 나를 모시고 다녀와주신 셈이다. 갈까하던 그 동네 고등학교는 근처에 집을 구하기가 곤란해서 학교는 포기하고 해인사 구경만 했다.

 

 

 

평일 낮에도 이 시기엔 늘 붐비는 곳인데 오늘 처음으로 해인사도 한산한 산사 느낌이 난다.

 

새로 생긴 기념품 가게에 하나하나 작품인 그릇 구경부터 한다. 동행한 분이 가시는 대로 따라다녔다.

 

 

수많은 염원이 모이는 자리, 나는 이런 곳에 오면 뭔가 잘 되게 해달라고 빌지 않는다. 바라는 바가 있으면 더 열심히 살겠노라고 나 자신에게 다짐하고 실천한다. 뭔가 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성에 맹세하는 행위가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뭔가 들어줄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오늘 나와 동행한 내 곁에 있는 인연의 앞날이 더 원만해지기를 바라는 염원에 손 모아본다.

 

팔만대장경이 있는 장경각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줄을 쳐놨다. 오래전엔 이 문을 넘나들어 다녔던 것 같은데......

 

페어리스타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앙증맞은 꽃화분 앞에 쪼그려앉아 강아지 만지듯 눈빛으로 어루만져본다.

 

템플 스테이 숙소도 코로나 19로 한산하다.

 

해인사 원당암에 오르면 가야산 자락이 시원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해인사보다 먼저 자리잡은 원당암, 거기서 제일 높은 자리에 벤치가 하나 있다.

 

마침 절식구 외엔 아무도 없다.

 

사방이 뚫린 그곳의 형세가 봉황의 등이나 어깨쯤 되는 곳으로, 앉아보니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명당이다. 그곳에 앉아 사방에서 불어드는 신선한 산바람을 즐겼다. 금세 날개옷이라도 입고 날아오르기라도 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바람이 좋은 곳이다.

 

말없이 가만히 앉아 풍경 사진을 찍어 어딘가에 보내시는 왕언니 옆에서 나는 그런 걸 보낼 데가 없어 혼자 어색한 셀카도 찍어본다.

 

맑은 산공기를 깊숙히 들이마시며 내 속에 든 찌꺼기 같은 생각을 흘려보낸다. 호흡을 가다듬고 머리를 비우고 잠시 진공 상태에 머문다.

 

소소한 잘못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마음에 걸리는 말과 글은 옮기지 말아야 하는데...... 탁한 숨을 내쉬며 탁한 생각도 내려놓는다.

 

아무도 모르는 게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작은 것도 스스로 반성하고 벗어야 한다. 내 속에 꼬인 실타래 같은 생각을 바람에 총총 풀어놓고 구름에 실어보낸다.

 

 

 

돌아오는 길에 진주에 들러 지난여름 정년 퇴임하신 왕언니의 교직 시절 지인을 만났다. 올해 2월에 교장으로 정년 퇴임하셨다는데 코로나 때문에 퇴임식 못 하셨다는 말을 시작으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와르르 쏟아내셨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밥 먹고, 특허 내셨다는 사업 소개도 들었다. 통영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그분은 남의 의견은 묻지도 듣지도 않고 쏟아내는 전형적인 꼰대라고 흉을 봤다. 

 

두 발 달린 고기는 안 드시는 왕언니께 저녁 메뉴에 대해 의논도 하지 않고 그냥 아무 데나 예약하고 안 드신다는 것도 그냥 드시라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셨다. 

 

내가 그분 흉을 보니까 소리 내어 웃으시긴 했지만, 왕언니께선 끝까지 그 분의 장점만 말씀해주셨다. 늘 배울 게 많은 스승이다. 그 분을 알게 되어서, 때때로 나를 이렇게 챙기고 아껴주셔서 감사하다. 

 

아는 사람도 많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많지 않지만,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 다 보석 같은 존재다. 나를 가끔 부끄럽게 만드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나를 더 좋은 사람이게 만드는 존재다. 텅 빈 마음이 따스한 빛으로 충만한 밤에 또 한 겹의 허위의식을 벗는다. 

 

눈을 감고 낮에 앉았던 자리를 떠올려본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내가 사라지고 다시 존재한다. 어느새 다시 그 자리에 앉았다. 지금쯤 얼마나 별이 총총 밝게 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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