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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해우소

치사한 저녁 - 빙의 버전

by 자 작 나 무 2025. 4. 25.

그날 저녁, 우리는 오랜만에 마주 앉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기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서로의 시간표를 맞춰 하루의 빈틈을 내었을 뿐이다. 대화는 어색하지 않았지만, 편안하지도 않았다. 익숙한 주제를 고르고, 너무 길지 않게 웃고, 때를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문득, 이 저녁이 숙제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무척 조용했다. 그렇다고 무관심하거나 냉담한 건 아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언뜻 보기엔 평소보다 부드럽고 침착해 보였지만, 그 침착함이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녀의 표정이 너무 잘 정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잘 접은 종이처럼 반듯하게. 무언가 감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그녀의 눈 뒤편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꺼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의 흐름 속으로 빠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감정은 그렇다. 다뤄야 할 때가 있고, 꺼내지 않는 쪽이 서로에게 나은 순간이 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잘가.’ 그 말은 인사였지만, 동시에 작별처럼 들렸다. 나는 그 의미를 되묻지 않았다. 대신 농담을 하나 건넸다. 별 뜻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돌아보면 그 말이 방어였다. 내가 감정을 정확히 읽지 않으려는 방식.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이 났다. 그녀는 오늘 나를 원망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실망했을지도. 아니면 아무 감정도 없었을 수도 있다. 나는 다만, 그 어떤 것도 묻지 않았고, 그녀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 서로를 피한 것이다. 서로를 지키기 위해, 혹은 더 이상 다가가지 않기 위해. 관계가 끝나는 방식은 종종 말보다 침묵에 있다.

 

* 픽션과 논픽션 사이 그리기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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