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정 해우소

감정의 물가에 앉아

by 자 작 나 무 2025. 5. 10.

물은 마시고 나면 흡수되고, 남은 것은 몸 밖으로 빠져나간다. 그처럼 마음에도 그런 장치가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감정은 흡수되기도 전에 오래 머무른다. 가라앉지 않고 떠다니며 생각의 틈을 벌리고, 어떤 날은 너무 무거워서 하루가 비틀린다. 그래서 나는 쓴다. 오래 두면 상할 감정은 써서 바깥으로 보낸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마음이 요동치는 날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이 자꾸만 낭비된다고 느낀다. 겹겹이 쌓이는 생각들, 응답 없는 상상들, 혼자만의 대화. 모두 쓰고 나면 조금 가벼워진다.


어릴 적엔 그런 감정조차 고마웠다. 짝사랑 하나쯤은 삶에 무게를 더해주니까. 좋아한다는 감정 하나가 하루를 환기해줬다. 그 감정이 보내는 조용한 신호가 세상과 연결되는 끈 같기도 했다.


지금은 다르다. 그런 감정에 스스로를 묶어두는 일이 점점 낯설어진다. 피곤하고 어쩐지 부끄럽다. 나이 든 여자의 소녀 감성은 대체로 불편하다. 나는 더 이상 그런 마음을 숭배하지 않는다. 마음 한쪽에서 피어올라도 이내 조용히 꺾는다. 감정을 꺾는 게 아니라, 감정을 키우는 내 안의 허기를 잠재우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도 쓴다. 흡수되지 않은 감정이 오래 맴돌지 않도록. 마음에도 배출구가 있다는 듯, 그렇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살아내는 하루의 중간쯤에서 문득, 이름도 이유도 없는 감정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것이 무엇인지 붙잡아 규정하는 대신 가만히 바라본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내 것이 아닌 듯 지나가게 둔다.


예전엔 모든 감정을 나의 것으로 만들려 애썼다. 왜 이 마음이 드는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파헤치고 해석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감정이란 반드시 이해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어떤 감정은 그저 스치고 가야만 덜 아프다.
말로 옮기지 않은 마음은 몸 안에 오래 남는다. 그래서 글로 옮긴다. 문장 하나하나가 내 안에 남은 감정의 잔여물을 쓸어내는 빗자루처럼 느껴진다. 비워낸다는 행위가 곧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는 일이다.


지금 이 감정도 그렇게 지나가겠지. 무언가를 바꾸지도 설명하지도 못한 채. 그저 한 문단의 끝에서 멈춘다. 문장 밖으로 나가지 못한 마음은 거기서 조용히 눕는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무의식이 먼저 반응하는 순간이 있다. 마음을 꾹 누르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사소한 문장 하나, 창밖의 빛의 각도 하나가 그것을 건드린다. 너무 오래 눌러두었던 감정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스며 나온다. 물이 아니라 그림자처럼.


그럴 땐, 잠시 눈을 감는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저 내 몸 안 어딘가에서 지나가도록 둔다. 어쩌면 이것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격렬한 표현 대신 느린 이해. 드러냄보다는 수용.


한때는 감정에 휩쓸려 살았다면, 지금은 감정의 물가에 조용히 앉아 있는 법을 배운다. 다 흘려보내지 못한 감정들은 단어 사이사이에 남아 언젠가 다시 읽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이 문장 안에 머무른다. 말 없는 감정처럼 조금은 투명하게.

'감정 해우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닿지 않은 손  (0) 2025.06.08
손끝의 거리  (0) 2025.06.03
감정이라는 고장난 나침반  (0) 2025.05.10
빗소리를 들으며….  (0) 2025.05.01
4.26  (0) 2025.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