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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길 위에서<2005>

화엄에 오르다

by 자 작 나 무 2016. 4. 27.

華嚴에 오르다

 

어제 하루는 화엄 경내에서 쉬었으나

꿈이 들끓어 노고단을 오르는 아침 길이 마냥

바위를 뚫는

천공 같다, 돌다리 두드리며 잠긴

山門을 밀치고 올라서면 저 천연한

수목 속에서도 안 보이는

하늘의 雲板을 힘겹게 미는 바람소리 들린다

간밤에는 비가 왔으나, 아직 안개가

앞선 사람의 자취를 지운다, 마음이 九折羊腸인 듯

길을 뚫는다는 것은

그렇다, 언제나 처음인 막막한 저 낯선 흡입

묵묵히 앞사람의 행로를 따라가지만

찾아내는 것은 이미 그의 뒷모습이 아니다

그럼에도 무엇이 이 산을 힘들게 오르게 하는가

길은, 누군들에게 물음이

아니랴, 저기 산모롱이 이정표를 돌아

의문부호로 꼬부라져 羽化登仙해 버린 듯 앞선 일생은

꼬리가 없다, 떨어져도 떠도는 산울림처럼

이 허방 허우적거리며 여기까지 좇아와서도

나는 정작 내 발의 티눈에 새삼스럽게 혼자 아픈가

길섶 풀물에 든

낡은 經소리 한 구절 내내 떨쳐버리지 못해

시큰대는 발자국마다 마음 질척거리는데

화엄은 화음 속에 얼굴 감추고 하루종일

굴참나무 잔가지에 얹히는 經典을 들어 나를 후려친다

 

김명인 詩

 

.

 

 

비 와서 엄청 추웠다. 딸에게 내 여벌옷을 껴입히고 걸어도 추웠다.

 

 

어릴 땐 여행길에 꼭 과자를 하나쯤 손에 들고 다녔던 딸

   

 

 

구례는 나에겐 특별한 곳이었다.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한 울림이 있는 지리산 자락이 이어진 곳이고, 그 산기슭엔 내게 잊지 못할 장소들이 몇 곳 있다. 한때 내 온 마음을 다해 연모하던 사람이 홀연히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나고 그를 10년 간은 잊지 않겠다고 무심결에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10주기가 될 때까지 구례에 찾아가곤 했다.

 

 

 

 

 

이젠 너무 오래 되어 모든 기억이 희미해져 버렸다. 저 해 초봄엔 꽃소식이 들리자마자 어린 딸 손을 잡고 화엄사로 향했다.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것이 소원인 사람이었지만, 나와의 인연으로 또 염원이 생겨 다시 환생하지 않을까 하는 나만의 기다림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다시 만난다면 헤어지지 않아도 좋을 인연으로 만나고 싶다고 몇 년을 기도했다. 그리고 딸을 얻었다. 꼭 그러하지 않더라도 나는 아이를 정성스럽게 키우며 내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 넣고 무한한 사랑을 주기로 결심했다. 

 

 

 

 

나도 그 사람의 영향으로 한때 열렬히 갈구하였으나 방향을 잃었던 부분에 대한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되었고, 윤회라는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갈망했다. 20대 후반에 세상과 연을 끊고 칩거한 상태로 거기에만 골몰한 적이 있었다. 끝없이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는 것. 우주의 섭리 속에 포함되어 생겨난 생명체의 순환의 법칙에서 과연 이탈할 수 있을 것인지......

 

 

 

 

 

 

살다 보니 그때의 심오함은 어느새 벗어났다. 이젠 다른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볼 수 있게 되어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잘 견뎌내는 나로 거듭났으니 어떻든 그 당시의 내 노력은 성과가 있었다. 최근에 오랜 친구이자 나름 존경하는 분이 이젠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는 확고한 의사 표현을 한 글을 읽고 다시 생각이 많아졌다.

 

 

 

 

 

난 아직 적어도 한 번은 다시 나와야 할 것이다. 그 보다 더 끝없이 우주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어디에서건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눈이 틔었으니 굳이 이 삶이 주는 자잘한 희로애락에 나를 내팽개치고 거기에 굴복할 만한 어리석은 시간은 줄어들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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