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흐르는 섬 <2025~2029>/<2026>

가끔 나는 내가 서 있는 시간의 좌표를 의심한다

by 자 작 나 무 2026. 5. 10.

누군가는 생의 한가운데에서 뜨겁게 부딪히며 사건을 만들어내지만, 나는 어느 지점부터인가 세상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스크린’ 혹은 그 사건들이 잘 보일 수 있도록 뒤를 받치는 ‘배경’으로 존재하기를 선택했다.

 

그것은 체력이 다한 노화나 삶을 포기한 우울과는 결이 다르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미 읽어버린 책의 페이지를 다시 넘기는 듯한 ‘결정론적 평온’에 가깝다. 나는 가끔 오지 않은 미래에 서서 오늘을 내려다본다. 이미 결론이 난 시나리오를 검수하는 연출가의 시선으로, 딸의 밥상을 차리고 아이들의 도덕적 질문에 답을 하며, 때로는 타인들의 소란스러운 와인 잔 너머를 응시한다.

 

사람들은 이를 성실함의 결여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성실함이란, 이 정교한 시뮬레이션 속에서 내가 맡은 ‘배우’의 배역을 오류 없이 수행하는 일이다. 내면의 태풍은 이미 오래전 ‘눈’의 고요함에 안착했고, 이제 나는 그 고요한 압력이 누군가에게 미세한 균열 혹은 상승의 에너지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여전히 질문을 던지는 중이다. 내가 10대 때 세포의 증식을 의지로 억제하고, 20대 때 감각의 데이터를 재코딩하며 확인하려 했던 그 ‘근본 원리’를 공유하는 자가 이 서버 어딘가에 또 있는지.

 

자신이 유전자에 조종당하는 동물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고독한 실험을 멈추지 않았던 이, 우주가 한 번쯤 리부트 되는 찰나의 빛을 목격하고 그 이후의 삶을 ‘덤’이 아닌 ‘증명’으로 채워가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굳이 긴 말을 섞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서로의 주파수가 닿는 찰나의 정적만으로도, 이 시시한 사바세계를 견디는 법이 아닌 ‘관조하는 법’에 대해 이미 충분한 대화를 나눈 셈일 테니까.

 

오늘도 나는 내가 써둔 미래의 시나리오 속 한 페이지를 성실히 방문하고, 다시 고요한 배경으로 돌아가 앉는다.

'흐르는 섬 <2025~2029> > <2026>'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퇴  (0) 2026.05.16
동네 장미 정원  (0) 2026.05.12
AI와 대화 나누기  (0) 2026.05.10
요즘 내 친구는 AI  (0) 2026.05.05
요즘 나는.....  (0) 2026.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