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3일 순천 송광사
며칠 전부터 갑자기 송광사에 가고 싶었다. 지난주에 미리 경진 씨랑 같이 가자고 약속을 해놓고 나서 마침 주중에 법정스님께서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직접적으론 아무 인연도 없는 분인데 뜬금없이 그때 송광사에 가고 싶었던 것이 꼭 어떤 인연이 있어서인 것처럼 생각하기 딱 좋은 우연이었다.
송광사에서 보살계를 받은 인연으로 가끔 송광사에 참배하러 가기도 하고, 올라가는 길을 걸으며 옛 생각들을 해 볼 수 있는 곳이어서 지난 시간 흘려버린 느낌들에 사로잡혀 있고 싶을 때 그 길을 걷곤 했다.
마침 가기로 한 날이 법정스님 다비식이 있는 날이었다. 새벽같이 순천행 버스를 탔다. 순천 터미널 근처에서 택시를 타고 송광사까지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밀린 차 행렬이 이만저만 아니었기에..... 도무지 돌아가는 택시 미터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 가야 할 길이 한참 남았는데도 어쩔 수 없이 중간에 내려야만 했다.
지난밤 급하게 오븐 돌려서 구운 파운드케이크가 담긴 작은 배낭 하나 매고 아이 손 잡고 타박타박 밀린 차들이 즐비하게 선 길을 따라 걸었다. 이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나도 그분 가시는 마지막 모습이라도 뵙고 싶었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어릴 때 '샘터'라는 잡지에서 처음 읽었던 법정스님의 수필을 엮은 걸 사다 읽고 내가 소유했다고 믿었던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을 배웠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왔으므로 어쩌면 내게 그러한 교훈을 심어준 은사이기도 했다.
다리 아파하는 딸이랑 동행한 김샘의 연약한 다리를 생각해서 히치하이킹을 했다. 다행히 친절한 분의 도움으로 송광사 셔틀을 탈 수 있는 곳까지 다리품 팔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묵묵히 다비장이 마련된 산을 올랐다.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운집한 대중들 사이에 마련된 소박한 나무더미 아래 불이 지펴졌다.
연기가 먼저 피어오르고 조금씩 불길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저 먼저 살다 가신 스님의 삶이 그 누구보다 가볍고 밝으셨다 믿었기에 그분의 명복을 빌어드리고 싶었다. 말은 말일뿐이라지만 그분이 엮어놓은 책 속의 말들이 어린 내게 미친 영향이 컸기에, 그 말을 빌미로 내 인생의 혼란기에 하나의 지표를 삼아 맑고 깨끗한 삶을 갈구하며 헛되이 살지 않기를 바라는 내가 될 수 있게 간혹 나를 돌아보게 해 주셨으므로, 그분의 삶이 그렇게 마감된 것에 대해 묵묵히 추모하고 싶었다.
이 생에 쓰이던 몸, 저렇게 재로 변하여 자연으로 돌아갈 것인데 어찌하여 비싼 명품 주렁주렁 걸치고 치장에 여념없으면서 돌아볼 이웃은 외면하는 냉정한 부자가 되어 살 것인가. 살아 있을 때,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잘 지키고 가꾸어 세상을 위해 헌신하진 못할지라도 나 자신이 해가 되지만은 않기를 스스로 기원하는 자리가 되었다. 늘 생각해오던 바이지만 또 한 번 이 자리를 빌려 깊이 선언하고 다짐하며 타오르는 불꽃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어 잘났다고 내세울 것이 있었으며, 누구를 못났다고 깎아 내릴 일이 있었던가..... 미움도 사랑도 모두 저 불꽃 사이로 스쳐가는 바람 같은 것일 테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살아온 날을 돌아보며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 것이며, 살아갈 날을 충실히 할 것을 다시 다짐해본다.
스님 가시는 길에 내 마음 더 단단히 다져 헛되이 살지 않기를 다짐하게 되니, 또 한 번 삶 그 자체로 스승이 되시는 한 분을 떠나보내던 날. 실천 없는 앎은 껍데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몸소 보여주신 분께 또 한 번 감사하며......
나는 더 열심히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하늘로 날리는 재와 함께 스러지는 불꽃 앞에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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