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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5~2029>/<2026>

파나마 게이샤

by 자 작 나 무 2026. 1. 2.

2026-01-02

코로나가 유행하기 직전, 2020년 초에 게이샤를 몇 번 마셨다. 워낙 비싼 원두라 동네 카페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고, 부산에서 한 달을 살 때 몇 번, 로스팅을 전문으로 하는 카페에서 한 번 더 맛본 게 전부였다.

 

그때의 커피는 향이 먼저 다가왔고, 맛은 그다음에 따라왔다. 기억 속의 게이샤는 분명히 특별했다. 2023년에 커피를 주문하며 오랜만에 게이샤를 골랐을 때는, 부산에서 마셨던 그 맛과는 조금 달랐다. 실망이라고 하기엔 애매했고, 그렇다고 감탄할 만큼 새롭지도 않았다.

 

그쯤에서 나는 선을 그었다. 입맛을 기르기 시작하면 생활비부터 흔들릴 게 분명했고, 한 번 기준이 높아지면 그 아래의 맛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더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어제, 우연히 나눈 대화 속에서 누군가는 게이샤를 내렸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이상하게도 여러 장면을 덧붙였다. 입맛대로 기호 식품을 고를 수 있는 삶, 선택의 여유가 당연한 사람의 일상. 굳이 알 필요 없는 상상까지 이어졌다는 걸 곧 깨달았다.

 

사실 나는 그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었다. 내가 아는 커피 이야기, 여행 이야기, 부산에서 마셨던 게이샤의 기억까지. 자연스럽게 말을 얹는 길은 분명히 보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 길을 그대로 덮어버렸다. 어차피 의지도, 의욕도 없이 우연히 시작된 대화였다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그 순간 더 노력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꽤 지쳐 있다는 걸. 커피 이름 하나에 상대적 박탈감 같은 감정을 덧붙이고, 굳이 필요 없는 비교를 떠올릴 만큼. 며칠은 쉬어야겠다. 어제처럼 추운 날 잠깐 밖을 돌아다닌 것만으로도 감기 기운이 느껴질 정도라면, 몸도 마음도 이미 신호를 보낸 셈이다.

 

조금 느긋하게 빌려온 책을 읽고, 짐을 정리하고, 어디로 튈지 천천히 궁리해보자. 생각난 김에 나도 오랜만에 파나마 게이샤나 한 봉지 주문해야겠다.

 

 

 

 

*

장이 열리자마자 T증권사에 뒤늦게 적게 몇 주 산 주식을 다 시장가로 팔았다. 주 거래 증권사인 H에 물린 금액이 -19%, - 28%인 양대 빌런을 오래 버리지 못하고 간직해야 할 것 같아서 한동안은 가늘고 길게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야겠다.

 

하지만, 난 오늘 T증권사에 주식 판 돈이 손에 쥐어지면 바로 따뜻한 나라로 가고 싶다. 딸이 꿈쩍도 안 할 것 같으니 말도 꺼내지 못하고 어디로 가자고 해야 딸을 설득할 수 있을지 아직은 한참 고민해야 한다. 한동안 따뜻한 남쪽에 살다왔더니 이 동네 추위가 싫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이제 조금 다른 생각을 해 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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