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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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비행기표를 예매하지 않은 채로 출발했다. 공항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돌아오는 표를 샀다. 조금이라도 싼 표를 찾다가 아주 넉넉한 날짜를 골랐다. 언제 돌아올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때는 다만 나갈 수 있으면 충분했다.
항공사 앱에 저장되어 있던 예전 영문 이름과 새로 만든 여권의 영문 이름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돌아오는 날 공항에서야 알았다. 비행기는 두 시간 가까이 연착됐고, 우리나라 시각으로는 새벽 네 시쯤 타야 하는 상황이었다. 졸리고, 피곤했고, 차분하게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딸과 공항 직원의 말이 한꺼번에 나를 향해 쏟아지는 것처럼 들렸다. 공격은 아니었을 텐데, 그 순간의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가장 수동적인 방법을 택했다. 10 달러를 벌금으로 내고 나서야 앱을 열어 잘못 적힌 영문 이름을 고쳤다. 조금만 숨을 고르고 순서를 밟았더라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 순간, 적어도 내 딸만은 내 편이 되어주었으면 했다.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아도 좋으니 나를 조금 덜 불안하게 만들어주기를 바랐다. 섭섭한 마음이 먼저 올라와 나는 감정을 놓아버렸고, 그 탓에 당연히 할 수 있었던 일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마치 벼랑 끝에 몰린 사람처럼 굴었다.
10 달러가 아까웠던 건 아니다. 다만 그 돈을 그렇게 쓸 거였다면, 여행 중 넘어져 다친 내 몸의 근육을 풀어주며 살뜰하게 손을 써주던 마사지사에게 팁을 조금 더 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더 서러웠다. 사소한 실수를 돈으로 정리하려는 그들의 태도도 싫었고, 그 상황에서 내 마음을 덜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느낀 것도 싫었다.
그날의 피로는 비행기 연착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항에 일찍 도착해 시간이 넉넉했다. 조급할 이유는 없었고, 천천히라면 얼마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감정이 먼저 앞서 나를 멈춰 세웠다. 생각은 있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고 마음이 먼저 주저앉아 버렸다.
짐을 부치고 자리에 앉아 그 이야기를 꺼냈다. 조금만 더 부드럽게, 내 편에서 말해주었더라면 나는 그 자리에서 휴대폰을 열고 앱을 열어 돈 들이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했을 거라고. 그래서 몹시 섭섭했고, 그 섭섭함이 엉뚱한 데까지 번져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싶은 서글픔까지 느꼈다고 말했다.
딸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눈가가 조금씩 젖더니 말을 꺼냈다. 자기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닌데, 너무 피곤해서 실수한 거라고. 여행의 끝에서 감정이 애매하게 꼬인 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왜 그 순간이 그렇게 아팠는지 바닥까지 꺼내 말했고, 딸은 그 말에 곧바로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내보였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안하다고. 그러면서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제야 몸에 남아 있던 피로가 조용히 풀렸다.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굳어버렸을 감정이 서로의 품 안에서 천천히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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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의 여행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마음의 바닥까지 꺼내놓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차피 그 자리가 마지막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굳이 더 무슨 말을 보태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말 대신 자리를 피했다.
왜 그렇게 마음이 꼬였는지 이해하려 들지도 못한 채 그저 ‘그랬나 보다’로 끝내버렸다. 상대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 나만 솔직해지면 이상한 사람은 언제나 내가 된다. 관계를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는 숨겨야 한다. 아주 깊지 않은 사이를 그나마 이어가기 위해서라면.
너무 솔직한 것도 병이다. 말하지 않아야 덜 다치는 순간들이 있고, 삼켜야 비로소 유지되는 거리도 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뒤로 나는 말의 가장자리를 조심히 다듬으며 산다. 말하지 않은 마음이 늘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침묵이 유일한 예의가 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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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반납하러 왔다가 결국 또 욕심을 냈다. 세 권이나 더 빌렸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기엔 조금 섭섭해서 도서관 4층 카페에 올라와 허니애플시나몬 차를 주문했다. 호수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들고 온 노트북을 열고 혼자 손가락 수다를 한참 떤다.
흘러가버리지 않고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생각들은 이렇게라도 써서 내보내야 덜 불편하다. 말이 되지 않아도 괜찮고, 정리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일단 꺼내놓고 나면 마음은 조금 가벼워진다.
도서관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무뚝뚝함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들. 특별히 기분이 나빠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정해 보이지도 않는다.
나 역시 굳이 삭막하고 떨떠름한 얼굴을 세상에 내밀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조금 더 웃으려고 한다. 인상을 잔뜩 쓰고 걷는다고 좋지 않은 일이 금세 좋아질 리도 없는데,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길을 걸어야 할까.
창밖의 호수는 오늘도 아무 말 없이 고요하다. 차는 달고, 생각은 많고, 이런 오후가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