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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길 위에서<2017>

연대도, 만지도의 가을

by 자 작 나 무 2017. 11. 2.


날씨가 너무 좋아서 갑자기 어디로든 가고 싶었다. 자주 가는 곳이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다른 느낌이 들기 때문에 가본 곳도 또 가곤 한다. 달아항에서 배를 탔다. 주변의 작은 섬마다 들렀다 가는 도선을 타고 약 20분가량 걸리는 연대도로 향했다.









요즘 사는 게 낙이 없다는 학생에게 "여행 갈래?" 그랬더니 좋다 해서 정말 갑자기 후다닥 집을 나섰다.  뱃시간 맞추느라 점심을 못 먹었더니 배가 너무 고팠다.  연대도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밥부터 먹었다. 섬 부녀회에서 운영하는 포장마차 같은 식당에서 우럭 매운탕을 주문했다. 이 동네 오면 매번 만지도의 전복 해물 라면을 먹었는데 어젠 너무 배고파서 밥을 먹고 싶었다.


몇 가지 나물 반찬과 함께 나온 우럭 매운탕은 1인분 만 원이란 가격대비 섬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론 상당히 괜찮았다. 소매물도에서 만 원에 먹은 음식을 떠올려 보면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간도 과하지 않고, 깔끔하고 양도 충분했다. 다음에 주말 아침에 딸이 안 바쁠 때, 매운탕 먹으러 섬에 가자고 꼬셔야겠다. 매운탕 좋아하는 딸 생각부터 났다. 앞에 앉은 학생은 엄마랑 같이 오고 싶다고 말했다. 학생이 아침 적게 먹고 점심이 좀 늦어서 밥 3공기 먹겠다기에 기대하고 있었는데 2공기 먹고 포기했다.













이곳에서 열심히 물수제비 뜨기를 하며 몹시 신나 하는 학생을 보며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학교생활은 그저 그렇고, 부모님은 바쁘셔서 이렇게 짧은 여행도 함께 할 기회를 얻기 몹시 힘든데 자긴 어디든 가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맞아 마침 동행한 이 걸음이 나도 즐거웠다.














만지도 선착장 앞 카페 주변을 깔끔하게 정비하여 지난 추석 다음 날 왔을 때보다 훨씬 예뻐졌다.



흔들 다리를 건널 때 다리를 마구 흔들리게 굴리던 학생의 장난기 때문에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평일 낮이라 사람이 거의 없어서 너무나 여유롭게 섬을 거닐 수 있었다. 늦은 점심 사 먹느라 보낸 시간 때문에 만지도에 새로 난 길을 걸어볼 시간이 부족했다. 섬에 들어오면 돌아오는 배 시간을 무조건 2시간 내로 제한해 버리는 바람에 시간이 모자랐다.


더 추워지기 전에 일없는 평일에 시간 맞으면 꼭 다시 도시락 싸서 이곳에 다녀가야겠다. 만지도엔 작은 섬 등성이를 걸어서 만지봉까지 갈 수 있던 길을 중간에 땅 주인이 길을 막아버려서 만지봉에 갈 수 있는 길이 사라진 셈이다. 그래서 바닷가를 따라서 그곳에 갈 수 있는 길을 새로 만들었다. 


만지도 바닷가 길은 몹시 짧은 구간인데 그곳 막다른 길에 바닷가를 따라 데크 길을 최근에 새로 만들어서 새 트래킹 코스가 생겼다. 그래서 몇 번이나 이 섬을 다녀간 나 같은 사람도 다시 갈 이유를 만들어줬다. 




연대도 둘레길엔 들꽃도 많이 피어있고, 아름드리 엄청난 둘레를 자랑하는 오래된 소나무들이 많다. 바람이 유난히 불어치는 언덕에 서서 저 정도 자랐으면 얼마나 긴 세월을 견딘 것인지 그 긴 세월을 견뎌낸 위용에 고개가 숙어지는 대단한 소나무다.










가을바람이 훑고 간 하늘에 구름이 바람의 노래를 들려준다. 꼭 이 순간 아름답다. 금세 또 흩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숨 쉬는 이 순간 그 아름다움을 호흡하고 즐기라. 삶이 고단한 순간도 또한 이처럼 흩어질 것이다. 삶은 수련장이다. 그대의 정신세계를 갈고 닦을 수련장.


내가 여고생이었을 적에 집 뒤에 있던 불교회관에서 겨울방학 기간 동안 자주 들락거리며 얻어보던 무협 만화의 주제가 삶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하는 무협 만화의 세계처럼 한 치의 실수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치열함, 그것이 부와 명예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정신세계의 칼날을 오롯이 세워 최고의 경지에 이르려는 것이 목적이라 했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하던 10대 소녀에게 그 스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4남매에게 무협 만화 100권을 읽으라 하시더니 독후감을 쓰라고 하셨던 그 스님이 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어둡고 삶에 회의적이던 내게 '더러운 물에서 연꽃이 핀다.'는 말씀을 하시곤 위로라곤 하지 않으셔서 그땐 몹시 섭섭했던 기억이 난다. 


일찍부터 겉늙어 애늙은이 같았던 내 10대는 내가 왜 태어나서 왜 사는지가 너무 궁금했다. 그 궁극의 답을 찾을 때까지만 살아보는 것 외에 특별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바꿀 수 없는 주변의 현실에 좌절했고, 결국 내가 나를 발견하고 바꾸고 가꾸는 것 외엔 너무 과한 욕심이란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아니어도, 우주는 잘 돌아간다. 내가 존재하지 않아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나는 이 우주란 바둑판의 하나의 돌인 셈이다. 다른 이들이 삶도 그렇게 바둑판의 돌처럼 다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고, 하나의 역할을 하고 모두 동등하나 서 있는 길목이 조금 다른, 비슷한 여정을 결국 걷게 될 존재들이다.


모두 동등하고 존귀한 존재다. 그런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시기가 좀 다를 뿐. 나는 10대, 20대에 이런 고민의 정점에 있었고, 그 답을 찾기에 혈안 되어 풍랑에 좌초할 것 같은 인생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하며 살았다. 



지금은 그저 아름다우면 아름답다 느끼고 계절이 바뀌는 것을 느끼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돈을 내고 사 먹는 밥 한술도 농사지은 분들이 감사하고, 내가 맛있게 먹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덕분에 자주 행복하다. 존재 자체가 고통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굳이 항상 나만 행복해야 한다고, 늘 행복해야 하는 것이 삶이라고 바락바락 우기지 않고 계절이 나고 드는 바람 속에서 나도 그냥 흔들리고 또 제자리를 지키면 그만 아닌가.










안타까운 일들이야 많지만, 지는 해를 내가 어떻게 하겠는가. 내일 다시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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