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새 연휴, 사흘 연휴 내내 집에만 있었더니 슬슬 갑갑하다. 산청으로 가는 길에 겨울 이불도 싸가야 하니 차 좀 태워달라고 강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이왕에 나서는 걸음에 함양 개평마을에도 가보고 싶었다.
산청에서 30분 남짓이면 갈 수 있지만 대중교통이 워낙 열악한 곳이어서 퇴근 후에 차마 갈 수 없는 가깝고도 먼 곳이다.
동네 한 바퀴 돌고
남의 집 담 너머 호박 구경도 하고
자연스러운 담장에 반해서 사진도 찍고
언덕진 산책길로 올라섰다.
언덕 위에 생각지도 못한 논이 있고, 그 곁에 지금은 손님이 없어서 운영하지 않는 것 같은 차 방도 있다.
이 언덕에 서있는 소나무는 다 번호가 붙었다.
큰 수술을 받고 쇠지렛 대도 하나 받치고도 산다. 생명은 이런 것이다. 모질게 살아남는다.
산책길을 다른 코스로 마저 걷고 싶었지만 해질 시간이다. 잠시 들렀다가 산청 기숙사로 돌아가야 하니 눈도장만 찍고 나가야 할 분위기다.
담장에 유난히 크고 실한 호박이 누렇게 익은 집을 기웃거렸다.
처음에 지나갈 때는 굳게 잠겼던 문을 열고 어디선가 집주인이 나타났다. 산청 수선사에 조금 전에 다녀오는 길이라며 친절하게 집안으로 우리를 청한다.
주인의 초대를 받아 마당으로 들어갔다.
지은 지 93년 되었다는 집 마당에 채소 심어놓은 것이 참 정겹다.
57년생 집주인보다 오래되었다는 장독대에 신기한 돌꽃이 피었다.
이런 마루에 누워서 하늘 보다가 한숨 자면 시원하고 달고 기분 좋겠다.
어디선가 날아온 꽃씨가 불 지피지 않는 아궁이 앞에서 무리 지어 자랐다.
다른 집보다 마루 한쪽이 더 길게 이어지게 만든 마루가 이 집의 특징이라고 주인께서 알려주셨다.
집주인께서 이 꽃을 두어 무더기 파서 나눠주셨다.
언젠가 진주 전원주택 마을에서 마당 예쁜 집에 초대받아 안주인께서 온갖 화초를 뽑아서 나줘주시던 것처럼 여기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나와 같이 나서면 자꾸만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며 강 선생님께서 함박 웃음을 지으시며 신나 하신다.
이것저것 자꾸 뽑아주신다. 심지어 봄에 분양해줄 수 있는 화초 자랑을 하시더니 봄에 꼭 다시 오라고 청하신다.
비 오는 날 징검다리 건너듯 돌 밟고 흙마당을 누빌 수도 있겠다. 나는 신나서 이 돌을 깡충깡충 밝고 다녔다.
너무 오래 붙들려 있었던 것 같아 대문 앞에서 인사를 나누다가 내가 연세를 여쭸더니 57년 생이라 하셔서 동갑이신 강 선생님과 더 반가운 마음에 악수를 나누다 결국 이끌려서 안으로 다시 들어가게 됐다.
봄에 쑥을 채취해서 볶아서 만드셨다는 쑥차를 내주셨다.
하늘빛이 묘하더니 뜻밖에 참 묘한 일이 생겼다.
직접 염색해서 만드셨다는 예쁜 차받침 중에 제일 맘에 드는 선홍색 받침을 내 찻잔에 놓아주셨다.
밖이 어둑어둑해지도록 앉아서 이야기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나를 산청에 데려다주고 거제까지 운전하셔야 하는 상황을 말씀드리고 겨우 자리를 물렸다.
어찌나 이야기가 잘 어우러졌던지 서로 연락처도 주고받고 다음엔 밥 해준다고 꼭 오라는 초대까지 받았다. 우리가 처음엔 관광객인 줄 알고 민박을 정하지 않았으면 그 댁에서 자고 가라고 말씀하시려고 말씀을 꺼내셔서 내가 얼른 이야기를 끊었다.
직접 농사지은 채소를 정갈하게 말린 것을 갖가지 봉지에 담아서 한 가방 건네주셨다.
받은 물건은 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겼다. 강 선생님도 그에 못지않은 뭔가로 화답하시고 서로 넘치는 감사의 인사를 나누며 겨우 헤어졌다.
나와 함께 어딘가 가면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어서 가슴이 벅차다며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에 나도 산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소리 내어 한참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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