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달리는 중에 호우주의보가 뜬다. 밖에 나갈 때만 해도 날이 흐린 정도로만 생각했다. 빗길을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돌아가기엔 조금 멀리 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미쳤구나...'라는 생각이 든 다음에 목적지를 바꿨다. 도착 시간이 15분 정도 줄어든다. 그런데 빗길 운전에 익숙해지니 처음 든 생각이 더 강해졌다. 매번 물국수와 유부 김밥만 먹던 그 집 메뉴판에 가득한 다른 메뉴를 거의 30년 동안 한 번도 주문하지 않았다.
그 아주머니도 꽤 연세가 드셔서 언제 문 닫을지 알 수 없는데 그전에 다른 메뉴도 먹어봐야겠다. 오늘은 막국수에 도전! 사소하지만 목표가 생기니 천근만근이던 몸이 금세 움직여진다. 딸에게 혹시 유부 김밥이나 국수 생각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자겠단다. 중간에 조금 가까운 다른 음식점으로 바꾼 것을 취소하고 애초에 가려고 마음먹었던 '제일 유부 김밥'집으로 향했다.
폭우를 뚫고 기어이 진주 시내까지 가서 주차하고 30분 이내에 막국수 한 그릇 먹고, 김밥 네 줄 포장했다. 두 줄은 딸에게 갖다주고 두 줄은 내가 가져가서 저녁으로 먹을 참이었다. 기숙사 앞에 가서 아무리 전화해도 딸이 받지 않는다.
정오 무렵에도 자고 있다가 부스스한 목소리로 받더니 오후 2시 반에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돌아가는 길에 커피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보다는 화장실을 좀 써야겠는데 비 오니까 마땅히 생각나는 곳이 없다. 겸사겸사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셔야겠다. 커피 맛이 괜찮아서 고른 카페엔 연이어 손님이 들어왔다. 화장실만 쓰고 슬며시 나가려는데 디저트 판매대에 소금 빵이 발길을 붙든다.
빵 한 개를 접시에 담고 계산대에서 얼떨결에 커피도 한 잔 주문했다. 비 떨어지는 게 눈앞에 그대로 보이는 야외 자리에 앉아서 벽에 등을 기대고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휴일인데 비 오니까 마땅히 갈만한 곳이 없어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가는 곳이 이런 곳인 모양이다.
30분 정도 앉아서 카페인 충전을 한 다음에 혹시나 해서 전화해 봐도 여전히 딸은 반응이 없다. 김밥 주고 가기는 글렀다. 어떻든 딸 얼굴 한 번 더 보려고 온갖 수를 다 쓰는구나. 며칠 함께 지내다가 말 한마디 섞을 사람 없는 공간에 혼자 있는 게 몸은 편해도 기분 좋지는 않다.
나는 참 한가한 사람이구나.
쫓기는 일이라고는 미뤄둔 업무뿐.
가볍고 엉뚱하고 발랄한 감정이 비 오는 날에도 넘치도록 충전되어서 돌아가는 길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도로에 물 폭탄이 쏟아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흥얼흥얼 따라 불렀다.
위험할 뿐, 이런 건 힘든 일이 아니다. 어떻게 하고 싶으나 어찌할 도리 없는 막막한 일이 앞을 가로막고, 보이지 않지만 깊이 심장을 관통하고 머리를 줄줄이 꿰어 엮어서 내가 아닌 듯 살게 하는 삶이 힘든 것이지.
내 인생에 그런 과정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왔다. 큰 문제 없이 지금 내 삶이 가볍고 묵은내 나지 않으니 잘 살아냈다고 여긴다.
이제 남은 앞날은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재밌는 일이 더 많을 거다.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에 목숨을 걸어도 일은 해결되지 않고 흘러가야 할 길로 흘러가고, 애꿎은 벼랑 끝에 걸었던 삶은 눈치 없이 이어져서 괴롭고 또 괴로운 것이 삶이다. 그런 종류의 삶에서 이제는 한참 멀어졌다. 내 삶 속에 온전히 있어도 결코 무겁게 침잠해 들어가지 않고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졌다.
폭우 속에도 나는 비 한방울 맞지 않고 머리카락 한 올 젖지 않는 안전한 차 안에서 바깥 풍경을 영화 보듯 가만히 보고 있었다. 적당히 가속 페달에 힘을 주었다가 빼기를 본능적으로 반복하며 평정심을 잃지 않고 천천히 혹은 빠르게 움직였다. 폭우에 휩쓸려 난파하는 삶을 관조하듯 나는 늘 안전한 곳에 있었던 거다. 감정을 실어 폭우 속에 있다고 한들 그 비바람을 내가 다 막아내거나 혼자 다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바람 치는 날엔 꼼짝없이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에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한번 해봤다. 가고 싶은 곳에 가서 먹고 싶은 것을 먹는 게 그다지 대단한 일도 아닌데 할 수 없거나 너무나 어려운 일처럼 생각해서 갇혔던 시간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는 작은 이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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