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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03~2009>/<2003>

느티나무 아래에서

by 자 작 나 무 2003. 8. 13.

2003. 8. 13
해가 어스름하게 질 무렵 바닷가 벤치에 앉아 물결처럼 무심히 흘러가는 청춘을 생각했다. 멀리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제법 속도를 내서 달리는 차 안에서 아이는 잠이 들고 나는 그 어둠 속을 무작정 달리는 것이 마냥 좋기만 했다.

언니는 자꾸만 추월하는 친구를 나무랐지만 그렇게 하는 게 도무지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로 이미 난 신경이 무뎌져 있었고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질주해주기를 바랐다.

회를 잔뜩 먹고 술도 한 잔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느티나무 아래 테이블을 얌전하게 놓은 그 달빛이 은근히 비쳐드는 산장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마침 오늘이 음력 보름이라 달이 밝았다. 구름이 엷게 달빛을 가렸다가 조금씩 흩어지는 모양을 보는 것조차 달달하다. 느티나무 아래에서 가지 사이로 보이는 달빛이며 산 아래로 타고 흐르는 선선한 바람이 좋았다.

달빛에 취해 그 언덕진 산장에서 하냥 음악을 들으며 밤을 새우고 싶었다. 자정이 가까워지면서 아이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차 안에서 다시 잠이 들고 나는 돌아오는 길에도 은근히 속도를 더 내보라고 종용했다.

한때 비행기를 즐겨 탔던 이유 중 하나가 먼 길을 지루하게 버스를 타고 가는 번거로움이 싫었던 탓도 있었지만 이륙하기 전 활주로에서 제법 속도를 내어 달리는 그 마지막 질주의 짜릿함이 좋아서이기도 했다.

딱 한 잔뿐이었지만 술기운 탓이었는지 나름대로 질주한다는 표현이 어색한 속도를 내는 언니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발에 내가 더 힘을 꾹 주는 상상을 했다. 겁 없이 속도를 내기를 즐기는 내 취향과는 다르게 언니는 늘 얌전하고 조심스럽게 운전한다.

아이를 함께 태우고 다니는 내게 고마운 일이기도 하지만 오늘처럼 속도감을 느껴보고 싶은 밤길에선 아쉬움이 남았다. 그대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뚫린 길만큼 밟아 끝없이 내달리고만 싶었으므로......

한동안 과속방지용 감시 카메라를 달지 않았을 무렵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를 한껏 과속하며 달렸던 그 기분이 잊히지 않아서 차분하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차 안에서 내 맘은 계속 동동거렸다. 모처럼 즐거운 밤나들이였다. 보름달이 뜰 때마다 그 산장 느티나무 아래가 그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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