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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행/길 위에서<2005>

보길도의 아침<2005/06>

by 자 작 나 무 2009. 11. 9.

 

 

2005/06/20 13:16
 
 
 
방안엔 옷걸이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새벽부터 아침 나절 내내 닭 우는 소리와 염소 소리가 번갈아 나서 일찍 잠을 깨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이불을 둘둘 말고 자도 피곤해지면 남들보다 훨씬 추위를 심하게 타는 탓에 이불 속에서 나오기가 싫었다.
 
지영이도 이불을 둘둘 말고 머리만 쏙 내밀고 방문을 열어 놓고 함께 새소리를 들었다. 어릴때 내가 자라던 집도 저렇게 쪽마루가 있고 흙마당에 나무들이 울창했었다는 이야기에 아이는 뭔가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문 앞에 비파나무가 있었고 노랗게 익은 것이 시선을 끌었다. 지영이에겐 처음 보는 열매였다. 나는 그 맛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일단 맛보기로 한 개 따먹고 싶었다. 지영이는 맛있다고 더 따달라고 조르고, 슬슬 주인 아주머니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허락받지 않고 두 개 따먹고 그 다음엔 양껏 따먹으라는 허락을 받고 몇 개를 더 따서 맛있게 먹었다.
 
 
 
 
 

저녁엔 컵라면으로 아침은 비파 몇 개와 빵 반쪽씩으로 아침을 떼웠다. 주말이라 방이 없을까봐 염려한 것과는 달리 보길도 전역엔 민박집 천지였다. 나는 그 집에서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머물면서 섬 전체를 꼼꼼하게 둘러보고 오고 싶은 욕심이 생겼지만 이번엔 그다지 준비없이 나선 첫 걸음이라 무엇이든 다음을 기약하고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사흘치 받아놓고 두 봉지 먹고 모셔둔 약을 한 봉지 꺼내 먹었다. 곧 잠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쏟아졌다. 아니 마취라도 되는 것처럼 이불 속에서 꼼짝없이 억지 잠을 드는 기분으로 잠들어버렸다. 이렇게 마음놓고 잠들 수 있는 월요일이 없었다면 그렇게 먼 여행을 마음놓고 갈 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오늘 쯤은 피곤해서 손도 까딱 못할 것을 예상하고 그 정도 뒷감당을 할 각오가 있었기에 몸을 최대한 긴장시켜서라도 가며 오며 써버리는 시간이 만만찮은 여행이 가능했다. 몇 번씩 벼르고 벼르던 곳이라도 쉬운 걸음은 아니었다. 돌아와 생각해보니 오는 길이 좀 늦었더라도 예송리 바닷가에 다녀왔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잠을 깨고 늦은 점심을 먹었어도 몸은 계속 약기운에 취한듯 몽롱하고 생각은 모노톤으로 흘렀다. 아무래도 당시에 느꼈던 생생한 느낌들이 사진을 펼쳐놓아도 그때만큼은 선명하지 못하다.

보길도보다 먼저 가 본 제주에 워낙 마음을 빼앗긴터라 보길도의 아름다움은 자꾸만 제주와 비교가 되는 얄팍한 마음을 간사하다고 꼬집어야만 겨우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침 나절 동천석실이 있는 산길을 오르는 걸음에 들었던 새소리가 귓가에 환청처럼 떠오른다. 컴으로 듣던 음악도 싫고, TV소리도 싫다. 컴퓨터가 내는 기계음이 보길도로 향하던 배의 엔진소리처럼 들려 멍한 내 시선을 다시금 그 바다로 이끈다.

아쉬운 만큼 여운이 남는 것만은 아닐텐데 보길도의 아름다움은 가슴 속에 잔잔한 여운으로 남아 잔물결처럼 기억 속을 찰랑거리고 있다. 다시 그곳에서 눈뜨고 싶다. 아침 입안에 향긋하게 번지던 비파를 몇 알만 까먹으면 일순간 소진되어버린 것 같은 6월의 의욕도 잃어버린 식욕도 다시 되살아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