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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03~2009>/<2005>

저녁 준비를 하다가

by 자 작 나 무 2005. 8. 24.

마지막 남아 있던 원두커피를 우려먹고 되도록 커피를 줄여볼 심산으로 새로 원두를 사지 않고 꽤 오래 버텼다. 그 사이 커피가 아쉬워 이웃집에서 커피 믹서 몇 번 타 먹은 그 맛에 길들어 자판기 커피도 더러 뽑아서 마시고 지난주에 원두를 사러 갔다가 커피 판매대에 커피를 갈아주는 점원이 두 시간 내내 보이지 않아 결국 커피믹스 한 통을 사 들고 와서 내리 타 마시고는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너무 마시고 싶어서 마시긴 했지만 애초에 내가 금 그어놓았던 것처럼 인스턴트커피는 몇 번만 마시면 몸에 무리가 온다. 좋은 원두를 사두면 너무 자주 많이 마시게 될까 봐 어지간한 것으로 한 봉지 사 들고 왔다.

 

새로 산 커피를 통에 담고 커피를 내렸는데 향이 좋았던 만큼 맛은 기대치에 못 미쳐서 한잔 가볍게 마시고 그냥 두었다. 저대로 커피가 졸아들면 오히려 진해져서 내 입엔 더 맛있다.

 

이웃집에서 삼겹살 파티를 하던 날 물을 붓고 고기 굽는 스토브 그릴이 기름을 쫙 뺀 고기를 담백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어제 아이랑 마트에 나가 밤참으로 고기 몇 점을 사면서 그 그릴을 끝내 찾아서 사 들고 왔다. 그리고 그날 맛있게 먹었던 그 맛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새 그릴에 고기를 굽고 쌈무에 싸서 두 번에 나눠서 먹으려던 분량을 단숨에 옴팡지게 먹어 치우고도 모자라 오늘 비가 추적추적 오는 길에 우산을 받쳐 들고 나가 또 고기를 사 들고 왔다.

 

몇 년간은 채식주의자라고 할 만큼 고기라곤 입에 대지 않고 지냈는데 요즘은 그냥 입맛에 당기는 대로 아무거나 먹는다. 특별히 건강을 생각해서 채식했던 것이 아니라 고기는 입에 당기지 않아서 먹지 않았을 따름이다.

 

아이와 함께 먹는 식단에 고기가 빠지니 늘 반복되는 메뉴를 탈피할 수 없고 한창 성장 과정에 있는 아이에게 채소 위주의 식단이 마냥 바람직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싶어 아이가 원하면 고기를 사다 먹이는 방향으로 하다 보니 결국 나도 그만큼 자주 안 먹던 고기를 입에 대게 되었고 이젠 가끔 내가 청하여 먹을 정도로 맛을 들이게 된 것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둘이서 뭔가 거나하게 음식을 해 먹는 것 자체가 번거롭고 서글픈 생각이 들어서 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젠 그 마음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거나한 식단을 준비하기는 여전히 어렵겠지만, 한 가지를 정해 일품요리를 해 먹더라도 제대로 만들어서 반듯하게 예쁜 그릇에 담아서 먹기로 했다.

 

점심 나절쯤 지독한 두통으로 자리에 누웠다가 어제처럼 잠이 들어버린 바람에 점심을 거르고 그대로 잠을 잤다. 깨보니 너무 허기가 져서 다시 머리가 띵하니 아팠다. 멸치육수 우려내어 찬찬히 하던대로 된장을 끓이려니 배가 너무 많이 고프니 마음이 급해져서 육수 양념까지 다 들었다는 '다담'을 넣고 된장을 끓여보았다.

 

역시 내가 내고 싶은 된장 맛하고는 영 다른 맛이 나서 실망스러웠다. 배가 너무 고팠던 탓에 있는 재료만 대충 넣고 끓여 한 그릇 먹기는 했지만 배고프지 않을 때는 그만큼 맛있게 먹기는 힘든 맵고 싱거운 맛이 났다. 곧 그 음식에 뭔가를 더 첨가해서 다시 조리한 후 아이와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을 준비를 해야겠다.

 

매일매일 행복하고 기분 좋다는 아이를 보면 나도 행복하다. 내가 만들어준 음식을 볼이 미어지도록 먹고는 맛있다는 감탄사 한 마디 들려줄 때 하루 종일 혼자 씨름하던 고민들이 순간 다 날아가는 것 같다.

 

 "엄마가 만들어서 더 맛있는 것 같아요..."

이제 제법 아부성 발언도 할 줄 아는 딸 크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장대한 스케일의 다큐멘타리 한 편을 가까이에서 감상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자라는 동안 겪은 심리적 변화나 정신적 발달의 과정이야 내게 깊이 새겨져 있는 부분이지만 외적인 변화와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상대와의 관계에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고받으며 느끼며 성장할 수 있는지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확신한 바대로 사랑을 많이 주는 만큼 아이는 더 긍정적으로 밝게 자라고 더 빨리 성장하고 있는 것 같다. 아직은 타고난 모습 그대로 타고난 골격 그대로 자연스럽게 자라주기만을 바란다.

 

내가 아이의 엄마라는 관계로 맺어져 얼마나 많은 정신적 영향력을 줄 수 있는지는 알고 있지만 아이에게 자연스럽지 못한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일방적인 강요의 차원에 속할 것이라 그 무엇도 내가 지닌 강한 가치관을 노골적으로 주입시키고 싶지는 않다.

 

이미 온갖 양념을 다 넣어 달인의 솜씨로 농축되어 만들어진 양념을 넣은 된장맛이 결코 자연스러운 손맛에 미치지 못하는 어색한 맛이었다는 사실이 비단 음식의 예에만 그치진 않을 것이다.

 

부모가 원하는 골격대로 아이를 맞춤하듯 키우는 부모들을 볼 때 사이보그 공장을 견학하는 기분이 든다. 교복자율화를 외치던 부모 세대들이 자율화된 세상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획일적인 교육시스템에 아이를 재단하고 있는 모습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따라가고 또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환이라고 일변하여도 어쩐지 서글픈 뒷맛을 감출 수는 없는 일이다. 나와 아이는 시골에서 자라고 있으니 시골스럽게 커가고 시골스럽게 사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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