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바닷가 산책길에 불꽃놀이를 보게 되었다. 마침 시야에 가리는 것 없는 장소에서 한산대첩축제의 하나로 불꽃놀이 하는 걸 보게 되었다. 화려한 불꽃이 바다에 반영으로 비치는 광경이 잠시 가던 길을 멈추게 했다.
주섬주섬 가방을 뒤져서 카메라를 찾았다. 바다 위에 비친 빛깔이 너무 고와서 찍어서 딸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메모리카드를 컴퓨터에 꽂아두고 그냥 나왔다. 시간대는 잘 맞았는데 준비 없이 나온 걸음에도 눈에 띄면 뭐든 찍어놓는 습관이 있는 내게 디카가 없는 그 날의 외출은 약간의 아쉬움을 남겼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염증이 생겨서 오래 걷기엔 불편했지만 나선 걸음에 가는 데까진 걸어갔다가 돌아와야겠었어 통증을 참아가며 욕심대로 걸었다. 그래야 어쩐지 시원할 것 같았다. 전날 갔던 전망대 아래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길에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났다.
인가가 없는 곳인데 어디서 먹을 것 찾을까 싶은 길고양이였다. 가끔 그 길을 걷다 보면 청설모가 어떤 날은 바닥에 누워 있는 날도 있었고, 아주 가끔 그날처럼 길고양이를 그 외딴 바닷가 산책로에서 만나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어제는 고양이와 마주친 것 외에 또 놀라운 녀석을 만났다.
고양이가 나를 피해 방파제 아래 어두운 그늘로 숨는 것을 보고 장난스럽게 야옹거리며 나름의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서 몇 걸음 가는데 갑자기 풍덩 하는 소리가 났다. 설마 덥다고 고양이가 수영을 할까?
나는 그 길로 들어서기 전에 물이 너무 맑고 시원해 보여서 수영만 잘하면 그대로 물에 들어가고픈 충동을 느끼던 참이었다. 그래서 물을 싫어하는 고양이도 그쯤 되면 수영하고 싶지 않을까 하는 재밌는 상상을 잠시 했다. 그래도 그렇지 고양이가 다이빙할 리는 없다.
고개를 돌렸다. 바로 앞 발치에서 얼굴이 말쑥한 녀석 하나가 물 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고 나를 보며 씩 웃는 것 같다. 그리곤 숨을 내뿜으며 기이한 소리를 냈다. 꼭 돌고래 소리 같다. 아주 어릴 때, 7살이었던가? 뭍으로 잘못 올라와 길을 잃었던 녀석을 본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물속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나를 보던 그 녀석은 해달이었다.
킥킥대는 소리를 내는가 했는데 그 곁에 있던 작은 바위섬에 올라가서 몸을 세우고 또 내 쪽을 보고 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그 녀석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이 내는 소리가 너무나 크고 기괴하여 놀란 것이다. 생긴 것은 귀엽게 생긴 녀석이 소리는 어쩜 그리도 크게 내는지.....
금세 또 헤엄쳐서 내 앞에서 알짱거리며 수영을 한다. 작은 인어를 만난 것 같은 충격에 몸이 굳어졌다. 방파제 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가만히 녀석을 보고 있었다. 카메라를 만지다가 메모리카드를 꽂지 않고 나온 것이 금세 기억나서 가방을 가슴에 품고 녀석에게 장난스러운 손 인사를 건넸다.
얼마 전에 딸이랑 어떤 건물 엘리베이터에서 엄마 품에 안겨서 엄마를 찾으며 서럽게 울던 녀석이 내 눈인사 한 번에 갑자기 생긋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던 생각이 났다. 나도 울다가 갑자기 웃던 그 아이처럼 해달에게 손을 흔들었다. 혼자 많이 걸어서 살짝 지쳐서 울적해지려던 순간이었다. 아무도 없는 그 한적한 길에서 만난 우연한 순간, 갑자기 흰 토끼를 따라 토끼굴에 들어온 앨리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서 녀석이랑 노닥거리다 보니 저 멀리 나처럼 혼자 산책을 즐기는 누군가 나타났다. 고개를 돌렸다 다시 바다를 보니 해달은 거짓말처럼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바로 앞에서 녀석 수염까지 셀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었는데 그사이 어디론가 가버렸다.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 한밤중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나를 유심히 보고 지나는 낯선 이의 시선을 의식한 다음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다 뒤를 돌아보아도 좀 전에 녀석이 올라가서 나를 쳐다보던 그 바위 근처에도 해달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가보고 싶었는데 비가 내린다. 비 내리는 바닷가를 우산 들고 혼자 걷고 싶진 않다. 근데 마음은 자꾸만 그곳으로 향한다. 가끔 그 바닷가에서 혼자 준비해 간 따뜻한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혼자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때론 혼자 오랫동안 가슴에 쌓인 묵은 감정들을 눈물로 쏟아내 놓기도 하는 나만의 장소다.
내일 개학이니 오늘 그다지 길지 않았던 여름방학 기간 동안의 게으름의 끝이 결국 아직 끝내지 못한 간단한 방학 숙제를 안게 된 딸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제까진 내가 산책하러 나가는 시각에 딸은 집 근처 학교 운동장에서 운동하곤 했다. 나는 정해진 트랙을 반복해서 도는 것이 갑갑해서 바닷가에 다녀오는 코스를 택했다.
이제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여름도 얼추 다 지날 것이고 9월이 되면 중학생으로서의 마지막 학기가 시작될 것이다. 개학 전야치고는 평화로운 저녁이다. 책 읽고 독후감 쓰는 걸 미루고 미루다가 지금은 소파에 드러누워 전자책으로 책 읽기 숙제를 하는 딸이 아직도 알아서 하겠다는 말을 여전히 그대로 믿기로 한 모질지 못한 엄마 노릇을 하고 있다.
며칠 전부터 이야기는 계속해왔지만 더 아이를 몰아세워서 억지로 하게 만드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 시간 관리를 잘 못 하는 딸에게 더 심하게 잔소리를 하지 않은 걸 언젠가 후회하게 될까 봐 내심 걱정하고 있다. 그래도 딸이 하는 걸 아직은 지켜봐 주고 믿어줘야 한다고 믿는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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