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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10~2019>/<2015>

8월 17일

by 자 작 나 무 2015. 8. 17.

내 아이 스물아홉에 어언 8년 만에 그 절에서 정말 우연히 말도 안 되게 우연히 Y를 다시 만났다. 처음 Y를 만난 곳도 그 절 마당에서였다. 고향을 떠나 살던 그가 그날 나와 같은 시각에 그곳에 서서 나를 보게 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우연은 아니었다.

 

그날 그는 내게 오래전에 한 약속을 은근히 꺼내어 말했다. 고등학생일 때부터 그 친구와 편지를 나눴다. 대학 2학년 때까진 잊을만하면 한 번씩, 혹은 마음이 당길 땐 한 달에 몇 번씩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철학적인 이야기나 문학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던 때였다. 대놓고 사랑 이야기를 해보지 못한 것이 그와의 인연에 대해 유일하게 남는 아쉬움이었다.

 

이야기해볼 용기를 내었을 땐 이미 늦었다. 그는 이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짝사랑만 하다가 길이 어긋나곤 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대화 중에 우리가 서른 즈음에 우연히라도 만나게 되어 서로 짝이 없으면 책임져주기로 했던 말. 녀석이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근데 그날 왜 나는 그의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그게 하나의 내 삶의 갈림길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다른 선택을 할 기회가 있었지만, 너무 곧이곧대로 생각하던 습성대로 자신을 내버리는 선택을 했던..... 지금에야 후회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떠올리진 않지만, 문득 그 생각이 났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데 까마득하게 오래된 그 일이 떠올랐다.

 

나에게 손을 내밀 때 마다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긴 짝사랑의 끝을 볼 수도 있었을 테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나이 들어 감정을 앓고 말 못 하고 보내버린 것이 마냥 억울한 사람처럼 감정을 그대로 펼쳐 보이는 무모한 짓도 하려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Y에 대한 풋사랑은 영원한 짝사랑으로 서로 어긋나는 감정으로 끝났다.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 그날 마주쳤다.

 

아주 가끔 그 절에 가게 된다. 정말 헤아리자면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게. 이젠 우연히라도 그와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에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이젠 담담하게 지난 이야기 웃으며 나누고 자연스럽게 농담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그즈음부터 감정의 흐름에 대한 성장이 멈춰버린 것 같다. 깊숙한 곳에 파묻어서 덮어놓으면 더 나를 힘들게 하지 않을 만큼 숙성될 것이라 여겼는데 여전히 나는 사람과 나누는 감정 관계에는 미숙하다. 천성은 숨기는 것 없이 드러내고 자연스럽게 흘러가고픈 생각들이 강한데 자라온 환경이 감정을 억압하고 삼키도록 은연중에 강요당하던 분위기여서 나는 겉으로 내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 본 적이 거의 없이 자랐다.

 

혼자 숨어서 울고, 혼자 미소지었다. 남에게 그런 감정들을 들키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슬픈 영화를 보면서도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베갯잇을 적시면서도 소리 내어 울어보지 못했다. 그땐 그랬다. 지금의 나는 내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한다. 굳이 드러내지 말아야 할 곳이나 상대가 아니면 그냥 드러내 놓고 감정표현을 하는 편이다.

 

왜 그렇게 별것도 아닌 것에 생각하고 계산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지금의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많은 것을 강요당하며 살았는지,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세상과 실재하는 세상은 왜 그렇게 다른지..... 그런 현실을 살고 싶지 않아서 나는 자유를 택했다. 그 선택으로 인해 힘든 날도 있었지만, 편안해졌다. 비로소 나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내 생각은 이리 흘러가는데 내색할 수 없고, 아닌 것처럼 표정을 감춰야 하는 삶은 너무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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