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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10~2019>/<2018>

11월 6일

by 자 작 나 무 2018. 11. 6.

오늘 퇴근길에 오동통한 볼에 기저귀를 차고 엄마 손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주 귀여운 아기를 봤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딸이랑 그 아기와 엄마 이야기를 하며 웃었다.

 

"엄마는 아직도 아기가 그렇게 좋아?"

 

"응..... 너무 늦어서 안 되는 줄 아는데 아직도 아기가 너무 좋아서 낳아서 키울 수 있으면 낳아서 키우고 싶고, 한 명 데리고 와서 키울 수 있으면 키우고 싶어...... 아기들은 다 예뻐....." 

 

"내가 낳아서 데려오면 네가 키울래? ㅋㅋㅋ"

"안 돼!!!! 절대 안 돼!!!!!"

 

딸이 내 농담에 절규한다

 

이야기 중에 딸이 심각한 표정으로 오늘 본 뉴스 이야기를 한다.

경기도에서 엄마와 조부모와 함께 살던 3살 어린이가 제주에서 숨진 채 발견된 뉴스가 연일 뜬다. 33살이라는 아이 엄마 행방은 아직 알 수가 없어 수색 중이란다. 그러잖아도 어제도 오늘도 문득문득 그 생각이 나서 몇 번이나 울컥했다.

 

딸이랑 나랑 나이가 그렇게 딱 서른 살 차이 난다. 세 살이었던 딸과 힘들게 살던 시절이 생각나서 더 마음이 아프다. 딸도 울고 나도 울었다. 

 

내가 어린 저 데리고 어떻게 몇 번씩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는지 힘들었던 이야기 가끔 한 적이 있다. 그 이야기 때문인지 그 아이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지 딸이 자기는 그 심정 이해가 된다면서 서럽게 운다.

 

"우리, 기운 내서 열심히 살고 누구든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뭐든 하자. 뭔가 하자."

그렇게 마음을 추슬렀다. 

 

낮에 급식소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 생각을 했다. 내가 대신 맡아서 길러줄 수도 있고.... 절박한 심정으로 어렵게 아이를 혼자 키우는 이에게 어떤 도움이든 주고 싶다. 

 

내 생각은 마음뿐일지라도 현실적으로 누구든 어떤 도움이든 줄 수 있는 이도 있을 것이고, 도움을 청해 볼 곳도 있을 텐데 한창 예쁠 나이에 멋모르고 엄마 손에 이끌려 가서 그 짧은 생을 마감한 아이가 너무 안타까워서 가슴이 찢어진다.

 

누구든 상황이 어떻든 밥을 못 먹고살아서 삶을 포기하는 일은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이미 그럴 수 있는 만큼의 경제 수준은 되었으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의 심화로 부의 편중이 극심하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벗어나기 힘든 처지에 있는 이도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절실한 도움이 필요한 부류가 어린 아이다.

 

부모 손에 휘둘려 목숨을 잃는 황망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내 딸과 약속한 대로 우리는 뭔가를 함께 할 것이다. 앞으로 살면서 내가 돈 많이 벌어 누군가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는 것은 어렵겠지만, 뭔가 다른 도움을 주거나 변화를 꾀하는 데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서 조금 덜 힘든 삶을 살 수 있게 돕고 싶다.

 

수능을 일주일 남짓 앞두고 딸이 불안해한다.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아서 생각이 많은 모양이다. 결심을 좀 늦게 해서 준비하는 기간이 짧았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냥 편하게 시험 치고, 상황이 여의치 못하면 한 해 더 공부하면 되니까 마음 편하게 먹으라고 다독여줬다.

 

따뜻하게 데운 방바닥에 등을 붙이고 딸이랑 얼굴을 마주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어쩌다 택배 기사 전화 외엔 올 일이 없는데 저녁에 뜬금없이 전화가 어디서 올까 하고 다른 방에 뒀던 전화기를 찾아 뛰어갔더니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동창이다.

 

지금 근무하는 학교에서 내가 수업하는 반에서 만난 학생의 엄마이기도 하고, 서로 절친은 아니어도 만나면 반갑게 안부를 묻기도 하는 친구다. 이 밤에 우리 집까지 무슨 일인가 했더니 내 딸 시험 잘 치라고 뭔가 챙겨서 들고 왔다. 가방 속에 달달한 마카롱이 들었다.

 

올해 서울대 들어간 그 집 딸이 마지막 일주일을 어찌 공부했는지 차근차근 일러주고 간다. 게으른 내 딸과는 아주 차원이 다른 차분한 그 집 딸의 비법이 내 딸에게도 통할 리 없겠지만 그래도 생각지도 못한 친구가 찾아와서 뭔가 이야기해주고 챙겨주고 가는 게 정말 고맙다.

 

 

허하고 쓸쓸하던 마음이 잠시 따뜻해진다. 내 딸 잘 키워서 여러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으로 세상에 내놓고 싶다. 수능을 잘 치거나 못 치거나, 뭘 하거나 그런 사람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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