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가치를 지나기 전에는 미처 알지 못할 때가 많다.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시간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왜 이렇게 시간이 더디게 갈까 생각하기도 하고, 충분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지나기도 한다.
이른 점심을 먹고 오래된 학교 화단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지나 학교 담장 허물기를 하며 학교 담장이 있던 자리를 동네로 열린 작은 공원 같이 만든 공간까지 천천히 걸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에서 걸을 곳이라곤 거기뿐이다.
운동장 너머에 있는 벤치 있는 곳까진 교내에선 거의 가는 이가 없다. 이어폰으로 밀린 아침 뉴스를 듣다 음악으로 바꾸고 나만의 휴식을 즐겼다. 하늘은 흐리고 딱히 기분 좋을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프고 힘든 일도 없으니 지금 나만의 가을을 즐길 때다.
곧 비라도 한줄기 쏟아지면 이렇게 간신히 버티고 있던 잎들도 떨어져 내려 더 삭막하고 쓸쓸한 곳이 되어버릴 이곳, 이 순간을 나라도 즐겨야겠다. 긴 가을 코트를 입고 코트 주머니에 손을 깊숙이 찔러 넣고 하나작 하나작 걷는다.
운동장에선 1학년 학생들의 축구 리그전이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 2학년 축구 리그전을 할 땐 시간이 맞으면 거의 매 경기를 점심 시간 마다 봤다. 그나마 좀 관심 있게 보는 게 축구뿐이다. 내 수업이 있는 반과 내가 들어가지 않는 반이 경기할 땐 내가 아는 반을 응원했다. 결승에 올랐던 두 반은 다 내가 아는 반이었다. 희한하게 결승 경기하는 날은 3학년 모의고사 치는 날이라 점심시간에도 시험감독을 들어가야 해서 결승 경기를 보지 못했다.
A반 학생 중에 한 명이 수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음 시간 체육이라고 바지를 훌렁 벗고 옷을 갈아입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서 그 예의없는 학생이 있는 반과 대항하던 다른 반에 가서 그 반을 이겨버리라는 유치한 말까지 했다. 거짓말처럼 그 반이 우승했다. 내 말을 듣고 왠지 이겨야 할 것 같아 열심히 해서 이겼다는 말부터 우승 상금의 얼마를 주겠다는 말까지 했다.
내 관심에 대한 학생들만의 응대였다. 내 관심에 관심을 가져준 것에 감사하다는 말로 가을이 깊어가던 날 벌어진 1차 축구리그전은 끝났다. 1학년 수업은 들어가지 않으니 어쩐지 별 관심이 없어서 그냥 나 혼자 산책만 즐겼다.
쓸쓸함을 즐겼다. 디카를 들고 다니며 쪼그리고 앉아 청승맞게 떨어진 잎을 찍고, 볼 것도 없는 길을 찍고, 나무를 찍었다. 시간이 흐르면 스쳐 지나가고 사라져 버릴 풍경이다. 그냥 담아둔다. 나중에 언젠가 이 시간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낄 때 다시 꺼내보련다. 햇빛을 쬐고 싶었는데 하늘이 흐리다. 그 핑계로 나도 모르게 계속 우울하다. 웃으려고 생각하고 웃지 않으면 절로 우울해지는 늦가을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