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일의 저주 같은 '수능 한파'는 없는 오늘은 창 너머로 들어오는 볕이 따뜻하다. 이른 아침, 딸 키우면서는 처음으로 보온도시락에 음식을 담았다. 우리야 학교 다닐 때 다들 도시락을 싸들고 다녔으니 보온 도시락이 일상화되어있었지만 요즘은 대부분의 학교에서 단체급식을 하니 도시락 쌀 일이 거의 없다. 더구나 보온 도시락을 준비해야 할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온라인으로 구매한 분홍색 대용량 죽통에 황기와 약재, 각종 채소와 닭, 전복 등을 함께 삶은 육수로 쑨 죽을 그득 담았다. 전날 밤에 우려둔 작두콩차를 데워서 보온병에 담아두고 평소에 딸이 아침으로 즐겨먹는 가벼운 음식을 준비했다.
수험장소가 거제대교 앞이라 내가 사는 섬에서 다리를 건너 또 다른 섬 거제 앞까지 버스로 한 시간을 가야 하는 곳이다. 쌩쌩 달릴 수 있는 자동차 전용도로로 택시를 타도 30분은 족히 걸리는 거리여서 일찍 나섰다. 우리가 탄 택시가 신호를 받고 한참 서있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돈다. 왜 이렇게 떨릴까......
교문 앞에서 딸을 꼭 안아주고 등 툭툭 두들겨서 보내고 돌아서는데 또 눈물이 핑 돈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혼자 눈물 나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이 모든 과정을 혼자 겪기엔 조금은 벅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흔한 부모형제로부터의 안부 전화 한 통이 없었다. 내가 먼저 연락을 끊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조금 섭섭하고 마음이 아프고 시리다.
'혼자 이만큼 키우느라 고생했어..... 잘 했다..... 수고했다.....' 혼자 내 손으로 내 가슴을 툭툭 치며 나를 달랬다. 마침 버스가 시내로 들어가는 노선이 아니라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는 변형 노선이다. 다리가 풀려서 걷기도 싫고 그 허전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라 종점까지 갔다.
터미널 근처에 24시간 하는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서 커피와 모닝세트를 주문해서 배도 고프지 않은데 꾸역꾸역 먹었다. 그냥 혼자 있기 싫었다. 모르는 이들이라도 있는 공간에 있고 싶었다. 평소에 먹지 않던 음식을 아침부터 세트로 먹고 나니 금세 몸이 피곤하다.
시계를 보니 그제야 시험이 시작될 시간이다. 수험장에 한 시간 일찍 도착해서 한 시간이나 버스타고 뱅뱅 돌다 이제야 집에 갈 생각이 든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는데 하필 하루에 몇대 있지도 않은 '홀리골' 들어가는 버스다. 터미널이 위치한 매립지 위에 세워진 신도시 건너편은 농촌이다. 같은 동 이름을 쓴다고 통영에서 제일 잘 사는 동네 애들이 대다수인 그 동네 학교는 뭔가 특혜를 받고 있는 이상한 동네다. 행정상 같은 지역이지만 길을 하나 사이에 두고 한쪽은 부촌이고 한쪽은 완전 시골이다.
홀리골에 쌩하니 버스가 들어가니 종점에서 할머니들이 장에 내다 팔 물건을 바리바리 싸서 기다리고 있다. 무슨 채소인지 꽉꽉 담은 큰 대야가 버스 문을 겨우 통과한다. 하차하는 문 앞에 앉아있던 내가 보고도 그냥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짐을 끌고 온 캐리어를 접고 있는 사이 대야 두 개를 끌어올렸다.
앞자리로 가서 버스비를 내시곤 자리에 앉으신 할머니가 앞자리 할머니께 말씀하신다.
"저 아가 고맙게 도와줘서 내가 편하게 탔다 아이가....."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는데도 들리게 크게 말씀하셨다. 나를 자세히 못 봐서 나이 어린 아가씨 정도로 인식하셨나보다.
내 나이쯤 되면 할머니들도 우리 또래를 '아주머니'라고 부른다. 모닝세트 먹은 기운 좀 쓰고 졸지에 어린 아가씨 대접도 받고 나쁘지 않다. 우리 집까지는 또 하염없이 많은 정류장을 거쳐 거의 종점까지 또 달려야 한다.
불안하고 지루해서 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데 그 할머니께서 벨을 좀 눌러 달라 신다.
"아가, 그것 좀 눌러 도...."
내가 수험생 엄마인데 나를 아가라고 부르시다니...... 내리실 때도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 허리가 휘어지도록 무거운 그 대야를 버스에서 내려드렸다. 찾아다니며 누군가를 도와줄 수는 없지만 기회가 생겼을 때마다 내가 하는 작은 행동들이 부메랑이 되어 내 딸에게 좋은 기운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꼭 돌려받지 않아도 될 담백한 친절과 작은 도움과 관심, 그런 것들이 일상화되어 함께 사는 정이 느껴지는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내 딸이 한몫했으면 좋겠다. 내 불안한 마음은 또 그렇게 달래고 집으로 돌아와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오늘 운전면허 갱신 적성검사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깜박했다. 시험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할 것 같다. 좀 더 기다리다 마치기 한 시간 전에 또 거제대교까지 가야겠다. 혼자 돌아오게 하기엔 먼 길이다. 묘한 허탈감과 함께 해 질 녘 해풍이 센 낯선 동네에서 혼자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 나처럼 딸도 어쩐지 눈물이 핑 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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