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흐르는 섬 <2020~2024>/<2021>

내 장례식

by 자 작 나 무 2021. 2. 21.

아무리 바쁜 세상살이에 쫓겨 살아도 장례식장에는 마지막 인사하러 들르리라 생각하고 죽을 날을 받아놓은 누군가 죽기 전에 미리 자신의 부고를 돌리고 살아서 치르는 장례식을 하는 장면을 드라마에서 봤다.

 

20년 전에 사소한 일로 등 돌린 친구도 부고를 듣고 나타나는 것을 보니 죽기 전에 만나서 인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미리 치르는 장례식이거나 정말 죽고 나서 치르는 장례식이거나 내 장례식을 치러야 할 때 누구에게 연락해야 할까?

 

내 딸에게 남길 유언을 간단하게 써놓아야겠다. 알려주지 않은 가족 연락처를 적고, 내가 죽었다고 알려야 할 지인 목록도 써놓아야겠지. 그런데 가족 연락처 외에 써놓을 연락처는 어느 선까지 누구에게만 알려야 할지 고민이다.

 

그나마 딸이 자라는 동안 알고 지낸 지인 중에 딸도 아는 블로그 친구 두 사람이 있고, 연락처는 알고 있으니 그 정도면 됐고, 뒤늦게 시작한 직장 생활 하면서 알게 된 직장을 매개로 한 인연 중에 연락할 곳은 달리 알릴 필요 없이 알릴만한 곳은 딸도 아는 사람뿐이다.

 

동창회는 나가지도 않았으니 대학 동기만이라도 알려야 한다면 그건 알아서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생략해도 되겠다.

 

내 장례를 치른다고 알릴만한 곳이 많지 않다. 내가 있어도 그만, 사라져도 그만인 사람에게조차 굳이 알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주 단출한 장례식이 되겠다.

 

죽음에 대해선 담담하다. 아프고 힘든 것을 견디며 사는 동안이 힘든 것이지.

 

빚은 없으니 됐고, 나에게 돈 빌려 가서 갚지 않은 사람 목록과 액수는 적어놓아야지. 내가 불시에 죽음을 맞는다면 딸이 그 돈이라도 받아서 생활에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남길 것은 이 블로그에 로그인할 수 있는 비번과 돈 떼먹은 사람 목록만 알려주면 될 것 같다. 그때까지 남길 것이 생긴다면 은행 계좌에 접근할 수 있는 비번도 필요하겠지. 내 인생은 참 단출하구나. 이렇게 간단한 것만 정리하면 된다니.

 

내 잡동사니는 다 태워서 없애고, 혹시라도 쓸만한 것이 있다면 누구에게든 주고, 내가 만든 가구는 싫지 않으면 딸이 썼으면 좋겠다. 더 예쁘게 리폼해서 부서지지 않으면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작은 가구는 없애지 말고 쓰다가 버리길 바란다. 

 

나 보고 싶으면 블로그에 남긴 사진과 일기를 가끔 읽어보면 그런대로 재밌을 거야. 비밀글은 그대로 두고.

 

그런데, 어쩐지 나는 108살까지 살 것 같아. ㅎㅎㅎ

'흐르는 섬 <2020~2024> > <202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딸의 데이트  (0) 2021.02.22
결핍과 갈망  (0) 2021.02.21
2월 19일  (0) 2021.02.20
2021년인 것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나 보다  (0) 2021.02.18
2월 17일 눈사람 - 정승환  (0) 2021.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