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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1>

결핍과 갈망

by 자 작 나 무 2021. 2. 21.

내가 처음 커피를 맛보게 된 것은 여고 시절 학교 매점 커피 자판기에서 나오는 인스턴트커피였다. 그보다 더 이전에 집에서 유리병에 든 커피를 타고 커피 크림과 설탕을 듬뿍 타서 내주는 것을 본 적이 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가끔 졸음 방지용으로 마신다는 자판기 커피를 단맛에 마시기도 하고, 친구와 같이 '에이스'라는 비스킷을 커피에 적셔서 먹는 재미로 가끔 마셨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커피는 믿거나 말거나 졸음 방지 효과를 위해 도서관 앞에 있던 자판기에서 한 잔에 100원 하는 커피를 하루에 한 잔 정도 뽑아서 마셨다. 두 잔 마신 날은 심장이 울렁거리고 속이 좋지 않아서 인스턴트커피는 내게 즐길만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20대 중반에 가끔 그 당시엔 대부분 커피숍이라고 불리던 카페의 전신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했지만, 딱히 맛을 알지는 못했고, 즐기는 편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향 나는 커피를 마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커피는 내게 특별한 기호식품은 아니었다. 서른한 살, 꽤 배가 불러올 즈음에 종종 커피 생각이 났다. 그때는 연하게 내려서 마시던 아메리카노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잘 찾으면 천 원에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실 수 있는 곳도 있었다. 

 

쌀 살 돈도 구하기 어려웠던 그 시절에 산달이 점점 다가오면서 배는 불러오고, 제때 끼니라도 해결하면 다행이었던 그때 하필이면 그렇게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천 원 쓰기가 어려울 때 매일 커피 한 잔씩을 마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볶은 보리를 잔뜩 넣고 아주 진하게 보리차를 끓였다. 그렇게 진하게 끓인 보리차에서 커피 냄새 비슷한 것이 났다. 진한 보리차에 맨밥을 말아먹으며 커피 마시고 싶은 충동을 누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잘 먹어야 할 때 밥이나 배불리 먹으면 다행인 이상한 상황에 부닥쳤고, 도움을 청할 줄 몰랐던 임산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참거나 우는 것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혼자 딸 키우면서 통장에 잔액 십만 원이나 남는 살림이라도 살 수 있기를 바라던 시기에도 커피는 일종의 한 맺힌 나의 로망 같은 거였다. 처음엔 커피 드립 기계를 샀다. 어쩐지 심심하고 맛이 없었지만, 커피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왜 그 커피는 심심하고 맛이 별로인지 알지 못했다.

 

나중에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기계로 내려주는 커피에 물을 탄 커피가 그나마 입에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한 잔에 3~4천 원씩 하던 커피를 마시러 매일 카페에 갈 수는 없었다. 내 살림살이는 커피를 얼마나 쉽게 마실 수 있느냐로 가늠할 정도로 내 욕구와 금전 관계는 꽤 깊은 관계가 있었다. 절제해야 할 순위를 정해야 최소한의 것으로 살 수 있으니까.

 

나와 딸은 나이 뒷자리 숫자가 같다. 딸이 일곱 살이 되든 해 여름에 프랑스에 있던 친구가 나와 딸이 함께 프랑스에 갈 수 있는 파리에 가는 비행기표를 보내줬다. 첫 해외여행이었다. 내 수중엔 20~30만 원 정도의 현금을 유로화로 바꾼 것이 전부였다. 우리 모녀를 초대한 친구가 차로 마중 나와서 전 여행 일정을 책임져줬다.

 

그때 일주일 동안 프랑스 여행을 하면서 식당에서 식사한 뒤에 꼭 한 잔씩 커피를 마셨다. 밤낮이 바뀌었고, 충분히 시차 적응하기엔 여행 기간이 짧아서 낮에 말짱한 정신으로 다녀야 하니까 각성제가 필요했다. 

 

이전에 마시던 물 같은 한국형 아메리카노보다 그곳에서 주는 커피는 진하디진했다. 여행이 끝난 뒤 한참 만에 그 여행에서 마신 커피와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마시게 된 커피 맛이 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의 커피 사랑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진하고 맛있는 커피를 더 싸게 자주 마실 방법을 찾아야했다. 그 당시에 내가 아는 방법은 에스프레소 기계로 뽑은 커피 뿐이었다. 내 형편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 비싼 기계를 사서 커피를 내려서 마실 형편은 안 되는데 커피는 매일 마시고 싶었다.

 

여행 후유증(?)으로 생긴 커피에 대한 갈망은 친구가 파리 어느 마트에서 아주 싼 가격으로 캡슐커피 기계를 사다 준 뒤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그 무거운 기계를 우리나라보다 엄청난 헐값에 파는 것을 알고 내 생각해서 일부러 사다 준 것이다. 

 

잉크젯 인쇄기를 싼값에 사고 나면 이후에 드는 잉크 값은 인쇄기 가격의 수십 배, 수백 배 만큼 쓰게 되는 것처럼 그 캡슐커피 기계도 내게 그랬다. 얼마나 많은 캡슐커피를 사서 마셨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그사이 같은 회사 캡슐커피가 업그레이드된 다음에 커피기계도 새것으로 장만했고, 거의 매일 커피를 마시며 산다.

 

밥 먹고 여유 있게 커피 한 잔 마실 때 기분, 카페에 굳이 나가지 않아도 집에서 맛있는 커피 한 잔 마시며 만족감을 느낀다. 혼자 더 잘 놀 수 있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뭐든 혼자 집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

 

오늘도 늦은 아침을 먹고 커피 한 잔 내려서 뜨거운 물을 부어서 마시면서 문득 그 생각이 났다. 이젠 그때만큼 커피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중독된 뇌의 장난 같은 것이다. 가난해서 밥도 못 먹으면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었던 그 시절의 한 맺힌 간절함은 충분히 벗어났다. 15년 동안 내가 마시고 버린 알루미늄 커피 캡슐의 분량도 어마어마하다. 

 

네스프레소에서 그 알루미늄 캡슐을 재활용하기 위해 재활용 백에 담아서 무료로 수거해주기에 그나마 큰 죄책감 없이 여전히 그 커피를 마신다. 매일 신선한 새 원두를 장만해서 갈고 천천히 내리는 수고를 하기엔 시간이 급할 때도 있고, 마음이 급하거나 여유가 없을 때도 있어서 상대적으로 간편하고 맛의 격차가 크지 않은 캡슐커피를 즐겨 마신다.

 

엊그제 친구가 한 잔하자고 불러서 나갔더니 술 한 잔이 아니라 커피 한 잔이었다. 낮에 커피를 마셔서 저녁엔 몸 사리느라고 다른 차를 마셨다. 밤늦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커피를 즐기는 광적인 커피 팬은 아니다. 

 

*

결핍과 갈망이 벌이는 신경전. 이 집에 이사든지 올해로 16년이 넘었다. 그전에 살던 월세방에서 6년을 살았고 여기에 이사해서 아직 이사하지 못했다. 16년 전에도 새로 갈아주지 않은 장판이 낡아서 형편없고, 새로 도배해주지 않아서 일부만 직접 도배한 것도 이젠 형편없이 낡았다.

 

이사 들 때 내가 가져온 가구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간이 서랍장 하나뿐이었다. 지금은 도무지 어디에 어떻게 치워야할지 모를 만큼 많은 물건이 집안에 꽉 찼다.

 

결핍 때문에 생기는 지나친 갈망이 오히려 꽤 넓은 이 공간을 물건이 다 차지하게 한 것이다.

 

또 다른 결핍도 마찬가지. 사람에 대한 갈망, 사랑에 대한 갈망은 눈덩이처럼 불었지만 어디서든 멈추지 않는다. 시간의 수레바퀴와 함께 한 자리에서 맴돌듯 빙빙 돌면서 허망함의 덩치만 불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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