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22
시작은 엊그제 처음으로 무를 튀김으로 만들어본 뒤에 꽤 식감도 쫄깃하고 자체 맛이 단 무로 오늘 한 번 더 전이나 튀김을 해보려는 거였다. 무를 썰어놓고 이왕에 연근도 손질해서 같이 튀기려고 냉장고에서 연근을 꺼냈다. 브로콜리가 눈에 띈다.
브로콜리를 씻고 손질해서 데치면서 메뉴는 갑자기 카레로 바뀌었다. 감자 깎고, 당근 썰고, 결국 가지도 꺼내서 큼직하게 썰어서 기름 없이 프라이팬에 구워서 넣었다. 먼저 볶아서 연하게 만든 양파맛이 섞이면서 환상적인 채소 수프가 된다. 소고기를 넣어야 어울릴 맛이지만, 고기 사러 밖에 나갈 정도로 이 음식의 완성도를 높일 생각은 아니어서 냉장고에 있던 갖가지 채소를 다 쓰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혼자 밥 없이 채소만 떠서 먹을 것이어서 재료를 큼직하게 썰었다. 한 번 더 데울 때 채소가 형태도 없이 뭉그러지는 게 싫기도 하고, 굳이 아주 작게 썰어야 할 이유가 없다. 먹을 사람이 나뿐이니까.....
내일 퇴근한 뒤에 여행 가방을 꾸려서 금요일 출근했다가 조퇴하고 2박 3일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그래서 냉장고에 모셔둔 채소를 싱싱할 때 먹어야 한다는 계산이 들어간 음식이다. 브로콜리 반개는 데쳐서 그대로 참기름과 깨를 넣어서 소금 간만 살짝 된 상태로 무쳐서 먹을 참이었다. 그런데..... 귀찮아서 한 개를 몽땅 카레에 넣고 말았다. 너무 많이 넣으면 채소 맛의 균형이 무너져서 맛이 별로다.
표고버섯이나 고기를 곁들였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있는 재료를 활용해 보려고 처음으로 구운 가지를 넣고 카레를 만들었다. 색감 좋은 음식은 눈도 즐겁다. 아삭하게 데친 연근과 살짝 데친 브로콜리까지 더해져서 아삭한 식감이 최고다. 기름에 볶은 당근과 기름 없이 팬에 구운 가지까지 상당히 괜찮은 조합이다. 나를 위한 음식을 만드는 것 자체가 치유의 일종으로 효과가 있다. 내 손으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 기분 좋아진다.
일주일에 한 번 들어가는 교실에서 마주친 그대. 피라칸타! 작은 유리병과 빨간 열매의 조합이 눈길을 끈다. 종일 일에 쫓기고 정신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가루가 될 지경이었는데 잠시 숨 돌리고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 순간엔 일을 하던 중이니까 그 이상의 감상에 빠질 수 없었다. 감정은 나중에 느껴도 되니까 일시 정지! 사진으로 담아와서 집에서 한숨 돌리고 즐긴다. 뭔지 모르게 감사하다. 작은 보답이라도 하고 싶다. 바빠서 한 번도 들어가 볼 여유도 정신도 없이 지내다가 그 자리에서 발견한 물병에 담긴 피라칸타 가지에 이렇게 감동하게 될 줄이야......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해 주려는 작은 노력을 수없이 반복하시는 그분의 마음이 오늘 새삼스럽게 빨간 열매처럼 작은 감동으로 영그는 저녁.
역시 뭔가 먹고 나니까 눈에 뵈는 것도 있다.
*
카레 사진을 블로그에 저장하다가 발견한 사진
아, 내가 그날 오후에 저기서 커피를 마셨구나..... 비도 피하고 화장실도 쓰려고 들어갔다가 입구에서 커피 3,000원이라는 문구를 읽고 선물 받은 쿠폰을 쓰려고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그날 책을 몇 장 읽었다.
도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고교 학점제를 하려는지 궁금했다. 다양한 수업을 할 수 있는 교실도 턱없이 부족하고, 다양한 과목을 개설해서 운영할 충분한 교사도 배정하지 않은 현실적 악재를 그냥 뭉개고 누굴 위해서 왜 하려는지 이해하고 싶었다.
고교 학점제의 원판이라는 미국 한 고등학교의 시스템을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과 비교하려고 메모했다. 수업할 수 있는 교실이나 제대로 만들어주고, 공강 시간에 학생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도 확보하고 저런 비슷한 것이라도 흉내 내야 하지 않을까?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행정 잡무까지 하면서 얼마나 내실 있는 수업 연구를 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질 높은 공교육 시스템은 멋진 모델을 보고 설계한다고 현실에 계획대로 반영되기는 쉽지 않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라면 이 시대에 걸맞지 않게 아직도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 같은 비현실적인 요소를 확실히 다듬고 시작해야 할 일이다.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넓고 깊은 눈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구나 싶다. 이 좁은 우물에서 조금 더 넓은 세계로 이어지는 길을 책을 통해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