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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섬 <2020~2024>/<2023>

11월의 봄밤

by 자 작 나 무 2023. 11. 23.

 

2023-11-23

 

봄밤처럼 남쪽 바다에서 불어드는 바람이 보드라웠다.

 

오늘 퇴근길에 딸이 수능 치던 날, 당시엔 차가 없었던 우리에겐 사뭇 멀었던 시험장까지 택시를 타고 가면서 조마조마했던 기억이 났다. 딸을 교문 앞에서 배웅하고 버스를 타고 다시 집까지 돌아가는 길은 멀고 또 멀었다. 그걸 두 번 반복하고, 세 번 반복하는 게 신경 쓰였던지 딸은 열댓 번째 원서를 그 학교에 넣었다. 어느 학교 무슨 과에 넣는지 묻지도 않았고, 원서를 쓸 때 드는 돈만 줬다.

 

네 인생이니까 어떤 선택이든 네가 하고 네가 책임지면 된다고 말했다. 어느 날 서울에 있는 대학이 아니면 가지 않겠다던 딸이 지방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2년 동안 열일곱 개쯤 원서를 썼을 테고, 그중에 삼수 방지용으로 보험 삼아 넣은 어느 학교에 그만 합격해 버린 거다. 

 

코로나 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내 딸의 비대면 대학 생활은 시작되었고, 이제 겨우 얼굴 내놓고 다닐만하니 졸업할 때가 됐다. 

 

내일 우리가 함께할 여정을 떠올리다가 수능 시험장 앞에 두 번이나 택시 타고 가서 내렸던 그 추웠던 11월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둘이 사뭇 먼 길을 떠난다. 여름에 더 먼 곳으로 차를 타고 여행하긴 했지만, 이번 여행은 다른 의미가 있다. 그간 혼자 키운 딸이 잘 커준 것도 고맙고, 탈없이 잘 키운 나도 괜히 대견하단 생각에 감정이 뭉클하다.

 

 

집에 바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엊그제 병원 가는 길에 봤지만, 마감 시간이 넘어서 맛보지 못한 쑥 붕어빵 리어카를 찾아갔다. 붕어빵 반죽에 쑥이 약간 들어갔다. 팥이 아니라 슈크림으로 채워진 붕어빵이어서 머리끝까지 달다. 바싹하게 잘 구워진 붕어빵을 네 마리 먹고 나니 온몸에 당분과 탄수화물이 주는 묘한 에너지가 뿜뿜 차오른다.

 

그래서 또 그대로 집에 들어갈 수는 없는 일. 한동안 잘 버티면 독거노인 신세를 당분간 면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어제 현관에서 나를 맞이해 주던 탁한 공기와 빈집 냄새를 맡으며 한마디 했다. 

 

"나, 곧 독거 노인신세는 면할 거야~"

혼잣말을 이토록 드라마틱하게 하는 사람도 드물 거다. 영화 대사 읊조리듯 온몸으로 말한다. 

 

오늘은 오랜만에 '냐옹이네' 가족을 보러 갔다. 아, 냐옹이 새끼는 한 마리인 줄 알았는데 오늘은 네 마리다. 올망졸망한 아기 고양이들이 나를 피해 슬쩍 거리를 둔다. 깨끗이 빈 고양이 먹이통에 영양 간식이라고 씐 사료 한 봉지를 털어놓고 바닷가에서 달빛을 즐겼다.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다. 내일은 갑자기 엄청 추워진다는데 오늘 바닷가에서 맞는 바람은 봄바람 같다. 그 길고양이 가족이 사는 화단에 크게 자란 로즈메리를 두어 번 쓰다듬은 손을 코에 갖다 대고 킁킁거려 본다. 생선살로 만든 걸쭉한 고양이 밥을 짜놓으며 손에 밴 묘한 냄새가 온몸에서 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새끼들이 먹이를 먹는 동안 어미가 내 곁으로 다가온다.

 

그리곤 내 앞에 보란 듯이 앉아서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나도 쪼그리고 앉아서 엊그제 만났다가 헤어진 친구처럼 안부를 물었다. 먹다가 엎어놓은 먹이통 가까이에 가보니 여럿이 나눠 먹기엔 양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어미가 내 손에서 난 먹이 냄새를 맡고 더 내놓으라고 말하는 것 같다.

 

 

 

눈치 없이 그냥 갈 뻔했다. 가족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뒤늦게 눈치를 채고서는 마트에 심부름하듯 달려갔다. 

 

이제 작은 사료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아서 양이 좀 많은 것으로 골랐다. 돌아서는데 더 괜찮아 보이는 소포장 대용량 먹이가 보인다. 대기업이 반려동물 사료 시장에도 뛰어들었구나. 소포장으로 나뉜 게 좋아 보인다. 매일 그 고양이 가족을 먹여야 한다면 이렇게 비싼 사료를 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언제든 보러 가서 말 걸 수 있는 길고양이 가족이 있어서 오늘 내 삶의 서글픈 시간은 다른 색깔로 바뀌고 마음이 포근해졌다. 이상하리만치 따뜻한 바닷바람에 몸을 맡기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한참 서성였다. 바다 한 번 보고, 달빛 포근한 하늘 한 번 보고, 열심히 먹고 있는 고양이 한 번 보고. 그것만으로도 안정감이 느껴져서 울컥 올라오던 감정이 달래진다.

 

고양이 몇 마리 존재 자체로 간혹 위안이 되기도 하니까 그들의 존재는 내게 얼마나 감사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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