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15
가장 가까운 가족끼리 아무 말이나 기분대로 쏟아놓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게 싫다. 그래서 가장 오래 보아야 할 딸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 험한 말, 잔소리, 참견 없이 자율+ 방목형으로 딸을 키웠다. 세종으로 이사하자고 한 건 딸 생각이었다.
가족이라고 해봐야 둘 뿐인데 혼자 고향에 남을 수도 없고 어차피 대학 졸업하고 기숙사에서 나와서 고향이라는 핑계로 남도 끝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이유도 없었다. 합의하에 이사하면서 아무 연고도 없고 이 지역 사람이 아니면 겪을 어려움도 있을 텐데 어떻게 살아남을지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둘이서 뭘 못하겠나 싶었다. 지난겨울에 친 취업 시험에서 딸이 낙방하는 바람에 우리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전적으로 취업 재수를 하는 딸이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랐다. 최선을 다하면 그냥 합격하기를 바란 거다.
그런데 시험은 떨어지고 그 사이에 무슨 수를 썼는지 방안에만 있던 애가 시험 끝나고 나니 남자 친구가 생겼다며 만나러 다닌다고 바쁘고 생전 하지 않던 게임도 열심히 하는 거다. 그게 뭔지 모르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공부한다고 하더니 매일 카톡 하고 게임만 한 건가? 이런 얄팍한 의심까지 했다.
지난주에 몇 번이나 힘들게 다녀온 면접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고 이유 없이 설움이 쏟아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의논할 데 하나 없이 혼자 끝도 없는 벼랑 끝에 선 기분으로 시험공부를 시원찮게 해서 떨어진 게 아니냐는 식으로 말을 돌려서 하고, 그 바람에 내가 좀 여유 있게 일해야 할 시기에 이토록 애를 태우게 되었다고 원망하는 말을 뱉고 말았다.
딸은 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걸 봐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오늘 서둘러 급히 내일 들고 갈 이삿짐을 꾸리다가 지쳐서 같이 앉은 저녁 식탁 앞에서 그 일이 마음에 걸려서 사과를 했다. 네 책임이 아닌데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날은 너무 속상하고 정신없어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고..... 내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맛있게 저녁을 먹던 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아이처럼 소리 내서 운다.
T인 딸은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는다. 그 일은 괜히 미안하고 가슴 아팠던 모양이다. 식탁에 앉아서 우는 딸 머리를 껴안고 미안하다고 달래며 나도 울었다. 그간은 어지간하면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고 힘든 것을 꺼내놓고 말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말한다고 달라질 것이 아닌 것은 감정 실어서 말할 필요가 없으니까, 내가 알아서 처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일은 다르다고 생각한 게, 우리가 함께 사는 가족인데 누군가 전적으로 책임을 다 지고 살림도 다 하고, 돈도 항상 내가 벌어다 생활을 해결할 이유는 없다고 여긴 점이다. 성인이 되었으면 제 삶을 끌어가는 데에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이런저런 핑계와 여유를 부리며 내가 주는 것만 받아먹고살면서 노닥거리는 것 같아 보여서 열불이 났다. 그럴 수 있는 때니까 그렇게 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했는데, 몇 해 전에 투자로 생각한 일이 사기를 당한 것이어서 내 삶이 송두리째 무너진 기분이 들 정도로 경제적 위기 상황이 되니 사람 속이 좁아지는 거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서 귀양살이 같은 귀향을 선택한다고 말한 게 또 미안해져서 내일 먹일 새 음식을 장만해 놓고 눈이 붙을 것 같은데 누우면 잠들지 못하는 상태로 일기를 쓴다. 내가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흐르는 섬 <2025> > <2025>' 카테고리의 다른 글
ChatGPT야 (0) | 2025.02.15 |
---|---|
얄궂은 기분 (0) | 2025.02.14 |
2. 13 (0) | 2025.02.13 |
AI 프로필 사진 놀이 (0) | 2025.02.13 |
또.... (0) | 2025.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