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990년대 일기

'첫사랑' 마지막 회를 보고 나서

by 자 작 나 무 2024. 9. 8.

* 옛날 일기 출력본을 찾아서 온라인에 한 편 옮겨 쓴다. 요즘 나이로 스물일곱 살에 써서 나우누리 자유게시판 같은 곳에 올렸던 글이다. 지금 옛날 일기를 읽어보니, 나는 간결한 글을 잘 못 쓴다. 오글거리고 웃기지만, 심사받으려고 쓴 건 아니니까 기록 보관용으로 옮겨놓고 가끔 읽어볼까 한다. 

 

1997년 4월

 

사랑은 온유하고 오래 참는 것이란다. 드라마의 마지막을 장식한 목소리에 담겼던 그 말은 익히 들어왔던 말이지만, 오늘은 그 말의 의미가 새록새록 깊이 가슴으로 스며드는 날이었다.

 

사랑이란 것이 시작되어 영글어가고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어물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사랑을 보았다. 그 미묘한 감정의 늪은 끝을 알 수가 없어 모르는 결에 빠져들어 가게 되고 빠진 것을 안 순간에는 이미 다시 나오기엔 벅찬 것이 사랑인 것 같다.

 

첫사랑은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해 어설퍼서 깨지기 쉽다고 한다. 어찌 사랑해야 하는 줄을 몰라서 순수와 열정만 가지고 덤벼들었다가 뜻밖의 시련과 부딪혀 항로를 이탈하거나 좌초하는 배처럼 그 처음과 끝이 항상 같을 수는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 우리 처음 사랑을 잊지 말자. 누구를 사랑하거나 몇 번째 사랑을 하던지, 그를 처음 사랑했던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 사랑을 어떤 모양으로 꾸려 나갈 것인지 흔들리는 순간에도 선명하게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행동할 수 있을 것이며, 참아야 할 순간엔 참아낼 수도 있을 것이라 여긴다. 

오늘, 한 편의 드라마가 오랜 시간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 속에서 나는 온유한 사랑의 힘을 배웠고, 순간의 고통이 참아낼 수 있을 때 얼마나 큰 것을 이루게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찬혁과 효경. 그들은 처음 하는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끝내 깨뜨리지 않기 위해 애썼다. 세련된 기술이나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마음을 지키려는 순수한 노력이었고, 그 노력은 결국 상처 없이 아름답게 매듭지어졌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오늘 꼭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약속한 날은 만나야 한다고,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나는 그를 질책하고, 가슴을 후비는 말로 상처를 주었다. 기다리게 하고, 실망하게 한 그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러고야 말았다. 평정을 되찾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이내 후회했다.

 

그가 너무 소중해서였을까. 어쩌면 그에 대한 지나친 집착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토록 바쁘고 힘든 그를 굳이 만나자고 조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탓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 감정은 마치 하늘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날카로워지고, 나는 또다시 흉측한 모습으로 일그러진다.

 

몇 번이고 헤어지겠다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그 생각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나는 아픈 눈물을 흘린다. 조금만 더 멀리, 조금만 더 크게 생각하면 달라질 수 있는 것임을 알면서도, 감정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나는 또다시 어리석은 감정의 포로가 되어버리고 만다.

 

사랑하는 이를 어떻게 마주하고, 그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는가에 따라 우리는 그 사람에게 온기를 줄 수도, 차가운 가시를 드리울 수도 있다. 감정에 휩싸여 이성을 잃고 상대를 괴롭힌다면, 그 사랑은 이미 '온유'의 음이 빠진 불협화음으로 전락하고 만다.

 

사랑을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 사랑을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때때로 감정을 다루는 '기술'이 필요하다. 순간의 감정만 조금 더 조절하고, 인내할 수 있다면 더 큰 사랑의 기쁨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급히 내뱉은 감정은 긴 사랑의 시간을 단숨에 잘라버리고, 그 상처는 깊다.

 

그렇게 아픔을 겪은 이들도 많으리라. 돌아보면, 조금만 더 느긋했더라면 이별하지 않았을 사람이 이제는 추억 속에 남아 있는 얼굴로 남았다. 그런 현실을 직시하고 나서야 우리는 다시는 그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감정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평범함을 넘어선 존재일 것이다.

 

그런 경지를 기대하기보다는, 감정의 거센 물결 위에서 적절히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의 심연에서 '온유'의 불씨를 지피고, 오래도록 그 온기를 유지해 보자. 그러면 아픔 없는 사랑의 역사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꽃 지는 밤  (0) 2024.09.08
지하철에서 만난 개 한 마리  (0) 2024.09.08
동기와 결과  (2) 2024.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