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5~1996년 사이. 어느 날 쓴 일기. 역시 나는 별 것 아닌 말을 참 길게 쓴다.
편지를 건네주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벌을 받은 듯하다. 그의 냉정한 목소리, 마치 모든 감정을 덜어낸 듯 차갑고 간결했다. 심플함이란 이런 것일까. 그를 만나기 위해 아홉 시간을 차 안에서 보내야 했다. 그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몸은 피로에 눌려, 부서질 듯 무거웠다. 결국, 짧은 통화와 가식적인 몇 마디 안부로 그 긴 여정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생길 수 있는 오해를 풀기 위해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나는 언제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걸까? 내 의지로 삶을 살기 시작한 건 고작 몇 년이 채 되지 않은 것 같다. 어쩌면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지치고, 피곤하고, 염세적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모르는 이들과 지하철 안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위안이 된다. 사이버 공간 속에서 사람들을 환영처럼 스쳐 가며 피로해졌던 내게, 지금 이 순간은 그저 눈앞에 실존하는 누군가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맞은편에는 중년 부부가 개를 안고 있다. 내가 처음 탔을 때 그 개는 바닥에 웅크려 떨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의 무릎 위에 올라가자 불안해 보이던 눈을 감고 조용히 잠들었다. 아이든 개든, 그 천진한 존재들을 보면 손끝이 저려온다. 하지만 요즘은 그저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그들의 얼굴에는 꾸밈없는 순수함이 깃들어 있다.
오랜 시간 차 안에 앉아 있었지만,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노트를 몇 번이고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스치는 풍경들, 그 속에서 떠오른 무수한 생각들. 그러나 펜을 들어 글을 쓰려 하자 손끝은 굳어버린 듯 한참을 멈추고 있었다.
작위적인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 같아 노트를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생각하며 어둠을 맞이했다. 지금 내 시야에 있는 것은 캄캄한 바깥세상과 환하게 불이 켜진 지하철 안,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 그리고 저 한 마리의 개. 나는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을 쳐다본다.
저 개도 나처럼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주인의 품에 안겨 눈을 감고 졸다, 깨어나 두리번거리다가 가끔 나와 눈이 마주치는 그 개는, 목에 끈이 매인 채 주인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주면 먹고, 졸리면 자는 삶을 산다. 개척해야 할 것도 없고, 선택할 것도 없으니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말이 나온 걸까. 이 순간 그 개가 부럽다. 하지만, 인간의 삶이 개의 삶보다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비록 피곤하고 골치 아픈 일이 닥친다 해도, 인간의 삶에는 그 나름의 가치와 의미가 숨어 있을 것이다.
만년필이 노트 위를 거칠게 지나간다. 나를 힐끗 보던 한 청년이 내 심각한 표정을 보고는 찡그린 얼굴로 내린다. 마치 내 모습이 정말 이상하다는 듯. (나는 이렇게 생각날 때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글쓰기를 좋아한다)
이내 다시 시선은 맞은편에 웅크리고 있는 개에게 멈춘다. 지하철에 올라탔을 때 하필이면 내가 탄 칸에 저 개가 있었을까. 개를 바라보며 문득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어쩌면 저 개는 내 머릿속에 가득 고여 있던 생각들의 실마리를 풀어내기 위해 나타난 화두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예정에 없던 길을 가고 있다. 종일 그랬다. 아침에 입고 나오던 옷을 바꾸면서부터, 지난겨울 헤매던 기억 속 길들을 되짚으며,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들을 지나왔다. 그 길에서 우연히 스쳐간 수많은 사람들 속에 나는 조용히 배경으로 섞였고, 지금도 저들 속에 스치는 배경으로 존재한다. 저들도 마찬가지로, 내게는 우연히 스쳐가는 배경에 불과하다.
다행히 옆자리에 앉은 여자는 처음부터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내가 이 행색으로 노트에 빠르게 글을 쓰고 있는 걸 본다면, 지금처럼 담담하게 글을 이어나가진 못했을 테니, 내심 고마운 생각마저 든다.
그 개를 멀뚱히 바라볼 때마다 복잡했던 생각들이 차츰 명료하게 정리되거나, 자연스레 사라져 간다. 사람과 개. 우리는 사람다운 언행을 하지 않는 이를 종종 개에 비유하곤 하고, 정력에 좋다는 말에 속아 개를 잡아먹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다정하게 개를 돌보며 집에서 함께 살아간다.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개는 인간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나는 얼마나 쓸모 있는 인간일까. 그 질문이 나를 갑작스레 덮쳤을 때, 모든 생각이 멈췄다. 숙제처럼 다가온 그 물음 속에서, 개를 안고 있던 부부는 내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지친 얼굴로 마주 앉았다. 지치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너무 멀리 와버린 길 위에서, 마음보다 먼저 몸이 지쳤다. 더 이상 무엇을 만들어낼 기운도 없이, 나는 노곤한 기운 속에서 그 숙제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엄숙해졌다. 어쩌면 나는, 주인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 그 개처럼, 연결된 끈이 있음에도 그 거리감 때문에 불안해하며, 그저 버림받지 않으려 공연히 몸부림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던 것처럼.
언제까지 이 많은 생각들을 미뤄두고 살아갈 수 있을까. 마주하고 풀어내려면 버겁고 고달프기만 할 것 같아 피하고 있었지만, 그 매듭을 풀지 않으면 결국 나를 영원히 묶어버릴 쇠사슬이 되어버릴지 모른다. 이런 두려움 속에서 더 이상 머물지 않고, 그 굴레를 과감히 끊어낼 용기를 가져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뜻밖의 여행은 이렇게 예기치 않은 선물을 주기 때문에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내가 가벼워진 삶의 한 조각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미뤄두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에게 겸허해야만, 비로소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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